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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혹은 개독

한국교회와 창조론

창조 vs. 진화

내가 예언하는 능력은 없지만 예언하건대 창조냐 진화냐의 문제는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영역이 될 것이다. 그건 창조론도 진화론도 과학이,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입증할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주장을 극도로 약화시킬 수 있는 질문 하나씩만 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창조론에 대해서는 '신이 있음을 입증해라'라고 질문하면 되고, 진화론에 대해서는 '중간 단계가 빠져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된다. 

사실 진화론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설사 진화론이 '신체적인 진화'를 입증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지능, 감정 등의 진화에 대해서는 절대로 입증을 할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아메바가 수천 억년을 지나 인간이 갖고 있는 생각하는 능력과 동물과 인간이 모두 갖는 감정의 영역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란 말인가? 수컷과 암컷이 교미하고, 남녀가 관계를 가진 이후에 그 후세대가 생겨나는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고 자웅동체인 생물과 알 속에서 부화해서 새 생명이 나오는 게 된 종으로의 진화는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인간이 외부에서 작업을 해서 시스템을 만들어야 AI가 만들어지는데, 그렇다면 인간과 다른 생물의 본능과 지능, 감정도 외부에서 어떤 존재가 그것을 부여했다고 설명하는게 더 논리적이지 않을까? 진화론이 그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우연히 그렇게 발달한 것이다]라는 답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렇게 진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믿는 것도 [입증과 논리]가 아니라 [믿음]임이 사실 분명해 지는게 아닐까?

이처럼 창조론이 입증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진화론도 완전한 입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두 이론은 이처럼 모두 어느 지점에 가면 '믿음'의 문제가 되지 입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창조과학회'라고 부르는 일련의 과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연도를 계산해서 '젊은 지구설'을 주장하는데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성격의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낮과 밤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게 낮과 밤이 합해서 24시간이라는 법이 있나?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여름과 겨울은 밤낮의 길이가 다른데 그 밤낮이 24시간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최소한 지금까지 나온 과학기술에 의하면 소위 말하면 젊은 지구설은 잘못된 것으로 증명이 되는 상황이라면 그걸 과학적으로 풀려고 하는 시도만큼은 포기하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창조과학회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노아의 홍수 때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들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런데 또 그렇게 따지면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하루는 365일, 24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는 자연환경을 가졌을지도 모르고, 그에 따라서 그 이전에 대해서 언급된 성경 인물들의 수명은 실제로 그 햇수만큼 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걸 어떻게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단 것인가? 그리고 통상적인 실험에 의하면 창조과학회 사람들의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지 않았나?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연구하는 자들이 본인의 성취감을 위해 연구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들이 그것을 믿겠다면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따라 말씀을 이 세상에 바로 세우는데 집중하면 된다.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이상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문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그건 인간의 능력으로 입증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영역임을 받아들이면 된다.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있고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만이다. 

과학적으로 대립해서는 안 되는 이유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놓고 과학적으로 누가 옳은지에 대해 대립하고 분쟁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고, 그런 논쟁을 야기하는 창조과학자들이라고 하는 분들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창조론을 과학적 논쟁으로 끌어감으로 인해 교회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창조] 자체가 기독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박진영 씨도 설명했듯이 창조론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설명하지 않는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과정을 통해서 성경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이라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외에 이 세상이 운영되는 질서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론 논쟁을 과학적으로 끌고 감으로 인해 그런 점에 대해서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지 않는단 것이다. 

그래서 교회들은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논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면 안된다. 창조론도, 진화론도 어차피 어느 지점부터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창조가 갖는 의미

우선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에 대한 내용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하신 하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있는 것] 임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말하는 '죄'는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남에게, 혹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기독교에서의 죄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지어놓으신 질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질서에서 벗어나게 된 건 결국 '지혜롭게 되고 싶은' 인간의 욕구인데, 이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이 옳고 똑똑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지 않나?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대부분이 자신이 더 지혜롭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나?

그래서 인간이 영원히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와 달리 스스로 지혜롭고자 하는 의지, 혹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이 땅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이 땅에서 추구되는 가치, 인간 집단에서 추구하는 삶에서 자유로워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이 땅에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 땅의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에도 메이지 않는 삶을 의미하기에 이 땅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죽는 것은 아니게 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기준'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기독교에서 죄가, 구원이, 영생이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과 질서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갖고, 창조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창조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

이러한 교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 번째로 이러한 교리에 의하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을 때, 내 안에 어떤 것을 심어놓으셨는지를 찾아가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간다는 것은 지금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어떤 능력, 성향, 환경을 심어놓으셨는지를 알아가고 그에 맞춰서 삶을 살아내야 한단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나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자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삶은 획일화되어있는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그런 기준을 갖고 삶을 살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내 안에 있는 능력, 성향, 환경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 명예, 권력을 무조건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의 모습을 부인하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은 성경적인 삶이 아니란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더 돈을 많이 벌게 만드셨고, 누구는 돈을 못 벌게 만드셨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사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성공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반드시 더 큰 행복을 선물해주지는 않지 않나? 그래서 기독교인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계획]에 따라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할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고, 하나님께서 완벽하시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내가 세상의 것들에서 [자유로워진다면] 누가 돈을 더 벌고 덜 버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안다. 이런 내용이 마치 사람들을 '네가 불만을 갖는 것은 네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야'라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단 것을 말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경은 [인간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그런 불만을 전혀 갖지 않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성경은 하나님은 그런 우리 모습을 아시고, 그래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그렇게 넘어질 때면 회개를 하면 용서하시고 그걸 잊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입으로만 잘못했다고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짓게 된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질서가 구현되는 방법

그렇다면 하나님의 질서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한 때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 어느 이념이 성경적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나는 두 가지 모두 성경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이념이 제대로 구현되었을 때 이 땅에도 [하나님 나라]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 즉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능력을 찾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고, 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그 경쟁에서는 패배할 것이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쟁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들어 놓으신, 다스리라고 하신 것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 또는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재능, 환경, 상황 덕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이 갖게 된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 성경적인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분배하는 것은 사실 사회주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을 발생시킨다. 다만, 나는 인간의 본성에 비춰봤을 때 그러한 사회주의 원리는 제도적으로 강제될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성화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 세상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적 제도 하에서 개인의 사회주의적 가치의 실천이 성경적이란 것이다. 

그 외에 창조가 갖는 의미

이처럼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에 대한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구성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교리는 과학적인 논쟁으로 가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내용 외에도 사실 창조 기사는 남자의 '갈비뼈', 즉 신체의 옆에 있는 뼈를 빼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남녀평등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는 신학자도 있는 등 창조 기사는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기독교의 신앙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이 땅에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능력, 상황, 성향을 주셨다고 성경은 창조론을 통해서 말한다. 그래서 사실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며, 내 안에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내 상황과 결합해서 어떻게 작용하는 게 이 땅에 내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워갈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살아내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 영역이 얼마나 크고 작은 지는 중요하지 않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다섯 달란트를 가진 자는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를 가진 자는 열 달란트를 벌어서 오지 않았나? 어떤 사람은 가정 안에서 한 아이를 잘 양육하는 게 본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속한 회사 안에서 그 질서를 회복하는 게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다. 아주 극히 예외적으로 몇몇 사람들은 국가적, 세계적인 단위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역할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뤄진다는 사도신경 고백이 갖는 의미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창조에 대한 내용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없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 그 해석은 비기독교적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