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을 오래 써왔다
블로그에 내가 옮기고 있는 글들은 내가 브런치에서 3년 정도 꾸준히 써온 글들이다. 브런치에서 쓰는 글의 색을 바꾸면서 글을 다른 매체에 옮기고 있다. 브런치에서는 '사랑학개론'이란 매거진으로 처음 연애와 결혼과 사랑에 대한 글을 썼었다. 매거진 이름은 그 이후에 바꿨지만.
사실 내가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브런치에서 내 글의 주된 주제가 연애와 결혼에 대한 것이 될 줄도 몰랐다. 매거진 제목에서 보여지지만 사실은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었고,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많은 가정이 깨어져 있는 현대사회에서 진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연애와 가정을 꾸린 이후에 부부생활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걸 시작점으로 잡았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쓸만한 주제가 많아졌고, 쓰다 보니 결국 핵심은 '나를 얼마나 알고, 그에 기반해서 상대방이 나를, 내가 상대방을 나를 아끼는 만큼 아껴줄 수 있느냐'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 때는, 아니 어쩌면 지금도 내가 쓰는 글들이 거기에서 거기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그것이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 표현되는 방식과 맥락이 다르기에, 일반적으로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논의되는 맥락에서 '그 원리에 대한 내 생각'을 설명하려고 할 뿐이다.
'사랑학개론'을 쓰는 이유
내가 그렇게까지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었던 것은, 가족의 사랑에 대한 매거진을 따로 만들어서까지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결국 핵심은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사람들마다 다르며, 그래서 그것이 연애와 결혼의 조건이라는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회사원이신 아버지와 가정주부이신 어머니의 아들로,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평범하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우연히도 주위에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 덕분에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혹은 잠시 경험해봤지만 그것이 주는 행복이, 기쁨이 순간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굳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 수 있다. 어쨌든 인간의 삶은 유한할 것이며, 우리가 죽을 때는 이 땅에서 우리의 '소유'로 갖고 있던 것을 갖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든 노동을 하던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착취하게 되는 경우가 사실 대부분이 아닌가? 사실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구조는 역설적으로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앗아가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들은 인생에 있어서 수단으로써는 최소한의 수준으로 필요하지만 사실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고 가는 유한한 기간 동안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날 세상이라면, 그 세상에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을 것이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관계'와 '사랑'
그런데 최근 CNBC의 보도에 의하면, 79년 동안 하버드에서 '인간의 행복의 비밀'에 대한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연구결과가 나온 듯하다. 대공황 시기인 1938년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이 연구의 네 번째 연구책임자인 로버트 윌 딩거 박사는 지금까지 연구에 의하면 가족, 친구와 공동체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구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그러한 타인과의 관계의 양보다도 질, 즉 친밀도와 관계의 깊이가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유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결국 그러한 '관계', 깊이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관계'는 가족 이외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친구들이 실질적인 가족처럼 같이 살면서 일상을 공유하면서 살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런데 또 사회학자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뒤르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친구들끼리 형성하는 공동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뒤르켑은 '사회'라는 것은 '동질성'에 기반한 연대성과 '상호의존성'에 기반한 연대성이 공존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친구'관계는 동질성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기에. (물론 그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런 관계가 형성될 확률은 높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
그래서 나는 현대사회에서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물질주의적인 가치관과 과도한 경쟁주의로 인해 가족 자체보다도 돈이, 성공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많은 경우에 부모님 대신 경주를 뛰는 경주마 취급을 받고, 가장은 돈을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하고 있으며, 가사노동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와 같은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아이가 그 안에서 '사랑'을 배우기는 어렵다.
가족, 관계, 사랑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경쟁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깊이 있는 관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마다 결론이 다를 수는 있지만 나는 '가족'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족보다도 약한 연대성을 가진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배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심지어는 가족 안에서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배신하는경우가 많지 않나? 그렇다면 깨어진 가족이나 가정, 서로 간의 '깊이 있는 이해가 있고 형성되는 관계'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하버드의 연구결과가 말하고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확률'은 그러한 사랑을,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이 아닐까? 물론, 확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은 그저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되었든, 자유연애가 허용된 현대사회에서는 남녀가 일정기간 동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겪고 그 끝에 평생을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야 비로소 가정을 꾸리게 된다. 따라서 건강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건강한 연애가 전제되어야 하며, 건강한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관계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연애만큼 잘 알게 해주는 과정도 없는 듯하다. (이에 대한 글들은 이미 '사랑학개론 초기에 작성했기에 디테일은 생략하겠다.)
이렇게 생가해보면 남녀 간의 연애는 각 개인의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에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내가 '실패한 연애는 없다'는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연애를,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고 결혼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그러한 전제하에 '사랑학개론'에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편이다. 내 글들에서 그 의도가 항상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또 나도 인간이기에 때로는 그런 의도를 잠시 망각한 상태로 쓴 글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은 내가 이 시점에 굳이 이렇게 길게 이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다시 한번 '사랑학개론'을 시작하게 되었던 초심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다시 한번 '사랑학개론'에 글을 쓰는 내 마음을, 자세를, 다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