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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예배

기독교인과 거듭남

예배는 당연히...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인 내게 예배를 교회건물 안에서 드리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내 성장환경의 특성, 그리고 나의 선택으로 인해 인생의 절반이 넘는 20년 정도는 공식적인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거나 않았다. 아버지의 직장에 따라 중국에 살 때는 4-5 가정이 모이는 가정교회에서 지금은 엄청나게 커진 상해 한인 연합교회를 시작하는 모임은 말 그대로 누군가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고, 인원이 많아지면서는 무도학교, 즉 춤 학교를 일부 빌려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매주 예배 세팅을 했다가 푸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기숙사 학교에 다니면서는 또 닭장을 교회로 개조한 곳에서, 제대 후에는 대형교회에는 다니기 했지만 대형교회 대학부들 중에 허리우드 극장이나 클럽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곳에 있어서 극장과 클럽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이후에 다녔던 교회는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고, 지금 교회는 촬영 스튜디오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일까? 난 어쩌면 올해 초에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 '4월부터 12월까지는 전체 모이는 예배는 월 1회 모이고, 나머지 주일(일요일)에는 성경통독반들끼리 예배를 드립니다'라고 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충격을 조금은 덜 받았던 것 같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주 솔직히는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규모가 작은 편은 아니라서 완전히 작은 교회로 옮기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기에 그 변화가 오히려 반가웠고 일단은 이 교회에 있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성경통독반 외에는 아무 사역도, 프로그램도 없고, 교회건물도 없으며 독립교단 (아무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교회들의 연합체) 소속이다 보니 기존의 전형적인 한국교회에 익숙하신 분들은 내게 '여기 이단 아니죠?'라고 물어보시기도 했다. 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에게 그걸 물어보시면 그 답은 당연히 아니라고 할 텐데 왜 물어보실까 싶으면서도 난 그 질문에 대해서 목사님의 이력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은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사실 파격적이지 않은가? 최소한 한국에서는 없던 모델이 아닌가? 그래서 3월 초에 우리 교회는 전교인 수련회를 하면서 목사님께서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교회의 교회 됨, 그리고 성도의 성도 됨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그리고 교회의 1/3은 흘러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고도. 예배는 당연히 교회건물 안에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신 분들은 교회건물 없이 스튜디오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우셨는데 이런 파격적인 변화는 더더욱 그러셨을 수 있을 듯하다.

약 2달간 내가 경험한 것

나라고 달랐겠나? 아무리 다양한 환경에서 예배를 드려 왔다 하더라도 난 어쨌든 목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설교하시고, 순서가 잘 다듬어져 있는 예배에 익숙해져 있었던 사람이다. 머리로는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색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더군다나 난 개인적인 이유로 딱 그 직전에 통독반을 옮기기까지 했으니...

예상대로 처음 몇 번은 굉장히 어색했다. 더군다나 우리 교회 평균 연령대가 꽤나 높다 보니 우리 통독반은 거의 우리 부모님 뻘이신 형제, 자매님들이 계셔서 (우리 교회는 집사, 권사, 장로 직분을 공식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그 불편함이 꽤나 많았고, 내가 처음 왔을 때 우리 통독반 분들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힘들지 않아요?'라고 반복적으로 물어보시고는 했다. '젊은 피'가 온 것은 반갑지만 불편할 듯해서 우려가 되는 게 있으신 듯했다. 나 역시 처음에 당황도 하고 '괜히 옮겼나? 또래가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고민하고 기도하고 옮겼을 뿐 아니라 그냥 배정받는 대로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옮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존재이며 적응하는 동물이어서, 아직 10번도 드리지 않은 그 통독반 안에서의 예배가 참 좋다. 겨우 2달 여를 본 분들인데, 이 안에서 관계의 어려움들이 있어도 그걸 버텨내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하나님을 더 바라보는 동력으로 삼으려 하시는 게 눈에 보이고, 그 얼마 안 되는 기간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들이 눈에 보인다. 그리고 매주 몇 시간을 같이 예배드리고 말씀을 읽으며 본인 얘기를 하다 보니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모태신앙인 내가 거의 40년 가까이 드려 온 예배를 많이 돌아보게 되더라. 과연 내가 지금까지 드린 예배들은 어땠는지, 그 예배들이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공동체를 만들어줬는지에 대해서. 물론 사정이 생겨서 지금 교회로 오기 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5년간 거의 같은 멤버들이 같은 예배 찬양팀을 하면서 그 안에서의 공동체성을 느껴봤기에 통독반이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 자체가 내게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배' 그 자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서로 교감하며 관계가 깊어지는데 기여하는 경험을 나는 처음 하고 있다.

예배는 무엇인가?

반면에 한국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아니 사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어떠한가? 교회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찬양 또는 찬송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나가는 것이 전부다. 그 이후에 소그룹 모임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엔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그 모임에 참석한다 하더라도 예배 자체로 통해 누리게 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사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할 수 있겠나? 예배는 망각하는 존재인 인간이 계속 신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교회는 연약함으로 인해 흔들릴 때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같이 그 사람을 붙들어주는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교회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사실 전도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김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와 예배가 필요하고 말이다.

과연 한국교회의 예배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실 한국교회의 예배들은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리던 모습과 다르지 않나?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마치 제사장처럼 대우받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한국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샤머니즘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사실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형식적인 제사는 거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매주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귀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빌면서 말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신약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와 교회는 다르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교회는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구약에 나오는 제사와 그들이 드린 예배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버트 뱅크스가 쓴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를 보면 초대교회에서 드려진 예배는 한국교회들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드린 예배에는 찬양도 있었지만 서로의 삶을 나누고 교제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면서 말이다. 사회적인 신분과 관계없이.

어떻게 예배드릴 것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나 역시 유년부, 초등부,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를 거쳤기 때문에 또래가 없는 예배가 처음에는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내 또래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인생을 사신 분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말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더라. 같은 연령대만 모여 있으면 보고, 듣지 못했을 것들이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과연 지금 한국교회들처럼 연령별로 예배를 나눠서 드리는 게 건강한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나누는 건 우리가 편하기 위해서, 어른들이 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힘드니까 그들을 그냥 맡기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아이들이 거기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또래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난 얼마나 성장했고 무엇을 배웠나?

돌이켜보면 또래들을 모아 놓은 것은 놀기엔 좋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게 많은 건 좋았지만 그게 내게 어떤 신앙적인 유익을 끼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뭘 배우겠나? 선생님들이 계시긴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었던 분들도 대부분이 20대에서 30대 초중반으로 '애들'이었다.

조금 불편해도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유치원생부터 완전 어른까지 함께 예배드리고, 그 안에서 삶과 기도를 나누는 게 진정한 예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하는 고민과 기도를 들으면서 신앙은 물론이고 세상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또 '애들이 뭘 알아듣냐?'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아이들은 귀에 들어오는 것은 확실히 알아듣는다. 그리고 어른들은 과연 설교의 얼만큼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나? 과연 어른들이 아이보다 나은 존재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이들도 처음에는 낯설지만 어렸을 때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되면 그 분위기에 적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국에 처음 가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 그랬으니까. 5학년이었던 난 처음에는 몸을 비비 꼬아댔지만 그것도 몇 주 지나니 적응이 되더라. 그렇게 예배하면, 그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면 세대갈등도 덜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어른에게서 성숙함을 배우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서 순수함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목회자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에도 목요일에는 설교 텍스트가, 주일(일요일) 전에는 설교 영상이 전달된다. 그것이 우리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묶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런 식으로 말씀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우리 교회의 방식이 정답은 아니다. 각 모임 별로 편차도 클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늘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도 아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까.)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 그리고 기독교인은 만들지 못하고 있단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배는, 예배가 기독교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에 맞는 예배 방식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실질이 형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형식이 실질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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