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에 다닐 때 '신앙'이 아니라 '신학'서적들을 읽었다. 신앙서적들은 너무 기복신앙적이었고 가벼워서 나의 호기심들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세계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더이상 신학서적들을, 아예 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잘 읽거나 큰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소위 말하는 '일반 성도'들이 잘 안 보는 책들 중에 관심이 있는 책들이 있다면 주로 성경을 더 들여다 보는 성서학쪽 책들인 듯하다.
신학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신학은 굉장히 중요하고 신앙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하고, 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계관과 가치관이, 신앙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신학은 유의미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학은 일정부분 너무 깊게만 파고 들어감으로써, 땅굴을 파고 너무 깊게 들어가 땅 위에 뭐가 있는지는 잊어버린 연구들이나 책들도 적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게 업으로 신학을 하는 사람이나 목회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다른 일을 생업으로, 하나님이 주신 일로 여기며 하는 사람들에게는 혼란만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결론에 이른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는데, 그건 신학서적들을 읽으면서 문득 '하나님이 정말 이렇게까지 진리를 어렵게 만들었을까?'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잘 안다면, 현실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힘들어 하며 사는지를 알텐데 이렇게까지 들여다 봐야 그 사람을 사랑하실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여기에 더해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시스템들의 변천사를 다룬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요구되는 것들이 과거에는 요구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때는 신을, 하나님을 잘 몰랐단 말인가?'란 의문이 들었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 당시에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 칼뱅 등은 오늘날 극보수주의적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문자주의적 성경무오설' 또는 축자영감설의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고, 잘못 알았던 것일까? 중세시대까지는, 그리고 그 이후로는 상당기간 동안 오늘날 기준의 '목회자'들 중에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나?
내가 '성경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강조하고,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그래야 오늘날 애매한 신학적 지식으로 기독교를 정의하려는 시도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문학적 접근'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지점들을 성경이 짚어주고 있단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망쳤는지를 돌아보면, 그 뿌리에는 성경을 자신들 마음대로 해석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들에게 가르친 목회자들, 그리고 의도는 갖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깊게 고민하고 숙고하지 않고 애매한 지식을 갖고 그게 전부인양 가르친 사람들이다. 신학은,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따로 연구를 깊고 균형적으로 하고,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겠거나 의문이 있는 점들을 그들에게 묻고, 성도들은 목회자들에게 모르는 점을 물어보는 구조가 가장 건강한 신학과 신앙 사이에의 구조가 아닐까 싶다. 그 가운데서 목회자들은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현실과 성경 사이에서 접점에 대한 공부와 공부를 하는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신학서적들도, 나의 관심사와 의문점들과 접점이 생기면 읽어보겠지만 그쪽을 깊게 팔 생각은 없다. 고등학교 때 하나님께 서원 아닌 서원 처럼, 난 목회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 치열하게 싸우며 살 생각이니까. 그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심어놓으신 성향, 경향, 계획이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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