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폭
사람들이 에스프레소를, 커피를 왜 마시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탈리아에 1달을 머물 기회가 있었다. 1달 정도 머물면서 취재하고 인터뷰하는 게 일상이었던지라 이탈리아 사람들을 과장 없이 수십 명 넘게 인터뷰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인터뷰가 5분을 넘어가면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하루에 심한 경우에는 10잔을 마신 적도 있다. 처음에는 그냥 쓰게만 느껴지던 에스프레소는 반강제적으로(?) 마시다 보니 그 맛을 알게 되더라. 난 지금도 에스프레소, 핸드드립, 아메라카노만 마시고 하루에 커피 2잔은 꼭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사 마시는 게 부담스러워 직접 내려서 마시는 편일 정도로... 그나마 리스트를 라떼로 넓힌 건 까미노에서의 경험의 영향이었다.
여행도 마찬가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곳에 가보기 전까지는 왜 그곳을 사람들이 좋다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그냥 유행 타는 거야'라고. 그런데 막상 그런 여행지들에 가면 사람들이 좋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더라. 물론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이유가 내 개인적인 취향과는 맞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데는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이 내 경험의 폭의 문제였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보고, 듣고, 느끼지 않나? 그것을 넓히는 과정은 사실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내게는 커피가 그랬고, 몇몇 여행지들이 그랬다. 사실 까미노도 '그 먼 거리를 날아가서 800km를 걷는 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 길 위에 있었고, 그곳에 다녀온 지가 4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노트북의 배경화면은 까미노를 걸을 때 풍경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본인이 가본 길에 대해서만 알며, 그 프레임으로 새로운 것을 보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모르고 말이다.
결혼이라는 길
결혼도 비슷한 듯하다. 결혼이라는 길을 간 사람들 중에는 죽어도 결혼은 하지 말라는 이들도 많지만 결혼을 하면 완전히 새로운 길이 열리며, 결혼은 꼭 하라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의 행위를 놓고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사람들의 평이 나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기는 쉬웠다. 친구들이 결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구속되는지를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달 전에 잡은 약속이 갑자기 처가에 갈 상황이 생겼다면 만나기로 한 날 다음날 깨지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아기가 생긴 이후로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결혼 전에는 꿈이 많았던 친구들이 결혼한 이후에는 자신의 삶이 아내, 처가, 부모님, 아이로 가득 차는 것을 봤다. 그들의 행복도 그 안에서 주로 발견되었지만, 그들의 새로운 불행도 그 안에서 나왔다. 그들은 분명 이전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결혼을 왜 하지 말아야 할지는 너무나도 쉽게 설득이 되었다.
하지만 결혼을 반드시 하라는 사람들의 말은 잘 이해가 안됐다. 결혼은 필연적으로 위와 같은 상황을 발생시키는데 도대체 왜 결혼을 꼭 하라는 것인지가 말이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20대 중후반 때부터 결혼을 하기 시작해서 이제 10년 가까이 미혼인 상태로 기혼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들은 내가 모르는 세계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한 기혼자들이 말하는 행복은 내가 싱글로써 느끼는 행복과 방향성과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기에, 어렴풋이 가족에서 느낄 수는 있지만 부모님과 자식이라는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다른 무엇인가를 그들은 경험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듯하더라.
그렇다. 생각해보면 결혼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 반경과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그런 변화 속으로 들어가서도 이전에 본인이 느끼던 것과 같은 종류의 행복을 느끼려고 한다면 그게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 하물며 여행도 장소에 따라 그 목적과 여행 방법이 달라지지 않나? 유럽에서는 문화와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여행을 하는 반면, 휴양지에서는 늘어지고 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나? 하물며 결혼을 한다는 것은 그보다 더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데 결혼을 해서도 싱글일 때와 똑같은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조금 이상한 걸 수도 있겠다 싶더라.
가보지 않은 길
사실 미혼인 내가 앉아서 '결혼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이 이렇게 달라지는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어떤 행복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지인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안정감, 행복감을 떠올려보면 그저 막연하게 싱글을 때의 행복과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사실 싱글이면서 아직도 더 하고 싶은 게 있고, 지금 느끼는 행복감을 더 길게 느끼고 싶다면 그런 행복을 지금 최대한으로 추구하면서, 반드시 최대함으로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행복감의 끝에 '아 이제는 여기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이게 평생 가지는 못하겠구나' 싶을 때 결혼을 하는 삶이 가장 행복할 것이란 생각도. 물론 결혼을 하지 않아도 평생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본인의 삶에 있다면 결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말이다. 다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한 가지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어느 순간 감소하는 듯해서 그런 행복감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나를 포함해서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이라거나,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단 것이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있는 제약과 짐스러움도 있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도 모르는 종류의 행복이 행복한 부부에게서는 느껴지기는 것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에 비춰 봤을때 결혼은 싱글일 때의 행복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싱글일 때는 알지 못하는 종류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제도가 아닐까 싶다. 아 물론 그건 나와 상대의 성향에 따라 없을 수도 있다는 게 결혼을 인생의 가장 큰 함정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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