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생각해 봤더라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당신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음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가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리고 내 생각도 반복적으로 바뀌고는 했다. 때로는 에너지원이 필요해서 아무거나(?) 먹었지만 때로는 정말 먹고 싶은 게 있어서 교통비까지 부담하면서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 분명한 답이 없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고, 어떤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살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이와 같은 다른 문제들과 조금 다른 것은 살기 위해 먹는지,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지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먹는 사람에게 음식의 맛이나 질은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은 에너지원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산업화가 이뤄지고 음식과 식재료도 어느 순간 컨베이어 벨트에서 생산되듯이 생산되기 이전에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 이처럼 살기 위해 먹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먹는 음식들 중 상당수는 조선시대나 머나먼 과거에는 귀족이나 왕실에서나 먹을 수 있었던 것들이 아닌가? 닭갈비가 사실은 갈비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닭으로 볶음을 하면서 거기에 '갈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란 사실은 많은 것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사실 JTBC의 삼시세끼만 봐도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음식을 만드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그것만 봐도 사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 인간은 살기 위해 먹었을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다.
음식에 대한 그런 접근이 바뀐 것은, 아니 달랐던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귀족이나 왕족에 해당하는 애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정식이나 유럽의 코스 요리도 그런 계층에서나 '먹기 위해 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먹기 위해 사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 먹는지,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지'에 대한 문제도 그때서야 부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물론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 경제적인 형편이 되는 경우에도 음식은 에너지원으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음식에 대해서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형편으로 인해 먹기 위해 살기보다 살기 위해 먹는 사람들이 여전히, 굉장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사회가 얼마나 평등한지, 공정한지, 행복한지에 대한 많은 기준들을 제시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수입을 기준으로 이뤄지기도 하고, 정치적인 권리를 기준으로 판단되기도 하지만 그런 기준들이 갖는 함의가 크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통계가 그렇듯이, 특정한 측면에서의 논의가 다른 영역을 배제함으로써 입체적인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듯이, 사회를 평가하는 세련된 방법론들은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래서 어쩌면 가장 주관적이고 측정되기 힘든 요소이기는 하지만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먹기 위해 산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여부가 한 사회의 행복지수를 잘 보여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먹기 위해 산다는 것은 그만큼 먹는 것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며, 그건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는 그래도 충족이 되어야 누릴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더 좋은 것을 더 비싸게 주고 사 먹는 것에 대해서 판단과 비판을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것을 기꺼이 비용을 지출하고 사 먹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지, 즉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먹기 위해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지도 모른다.
사실 먹는 것 만큼 직관적인게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