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내가 상대의 특정한 요소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글이 오해를 야기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들더라. 아니, 사실 글을 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고 그래서 그 글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그걸 의식한 맥락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 글에도 분명히 썼지만 난 그것이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만나면 안 되고, 학력이 상대적으로 열위라고 사회적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더 좋은 학력의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는 의미로 쓴 것은 아니다.
사실 난 오히려 '야 네 분수를 알아'라든지, '거울을 봐'라는 말에 반대를 하는 사람이다. 정말 친한 20년 지기 누나가 있고,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편인데 실제로 그 누나가 '야 거울을 좀 봐'라고 하길래 나는 '거울을 보니까 외모를 의식해야겠어'라고 되받아 친 적이 있다. 거울을 보니 내 2세가 나보다는 외모가 나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외모를 의식해야겠다는 의미. 물론 농담으로, 특유의 티격태격거리는 패턴에서 한 말이지만 누군가가 못생겼다고 해서 잘생긴 사람이나 예쁜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거나, 키가 작다고 해서 큰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거나, 집안이 부유하지 않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사람을 만나서는 안된다는 명제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단 생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관계에서 사람들의 스펙은 거래대상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학력이 좋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예쁜 사람, 운동을 한 몸인 사람 등 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마치 거래적인 요소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 듯하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스펙을 따지고 거래를 하듯이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단기간 동안 연애하는 데 있어서는 일시적인 안락함이나 편안함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길게 본다면 그렇게 '스펙'으로서 스펙을 따지는 것은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 사람이 학력이 좋다고 해서 자존감이 꼭 높은 것은 아니고, 지금 돈이 많아도 언제든지 가난해질 수 있으며,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잘릴 수도 있고, 운동을 하던 습관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들면서 못생겨질 수도 있는 것이란 의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따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요소들 이면에 있는 '왜?'라는 요소가 중요하지 그런 스펙을 마치 거래하는 요소로 따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란 의미다. 예를 들어 매우 좋은 대학을 나온 내 친구의 경우 학력을 별로 의식을 하지 않고 소개팅에 나갔었는데 서울에서 중하위권으로 분류되는 대학을 나오신 여자분이 만난 지 10분 만에 '사실 학력을 듣고 만나지 않고 싶었다'고 하셨다고 한다. 주위에서 좋은 대학 나온 남자와 조금 덜 좋은 대학을 나온 여자가 결혼해서 살 때 행복한 경우를 얼마 보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그분도 어떻게 보면 상대의 스펙을 의식하신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학력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행복할 가능성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접근은 상대방의 '스펙을 따지는' 행위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외는 있기 때문에, 아니 생각보다 많기 때문에 그 분의 기준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계중심적'으로 접근하는 그 분의 접근방법 자체는 맞는 것 같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은 '확률적으로' 상대가 일정한 특성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을 피하거나, 그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가능하면' 특정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은 상대를 찾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의 특성'이 아니라 그 사람과 같은 스펙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내가 돈을 얼마 못 벌 테니까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된다던지, 내가 학교가 안 좋으니까 상대는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을 만나는 게 주된 목표가 된다면 그건 상대방을 '사람'이 아니라 나의 '장식품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이랑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내가 돈이 많으니까 상대도 돈이 많아야 한다던지, 내가 좋은 학교를 나왔으니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치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들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평생 백수로 살 수도 있고, 좋은 대학을 나와도 공부하는 머리만 있고 삶의 지혜는 없을 수 있으며, 좋은 회사에 다녀도 언제든 잘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회사가 망할 수도 있으며, 돈을 지금 많이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한방에 날리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지일 것이다. 만약 결혼까지 생각을 한다면 말이다.
어떠한 사람의 스펙을 의식하는 것은 좋은 사람을 찾기 위한 필터링 수단으로는 사용될 수 있어도,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단 것이다. 사람은, 사랑은, 연애는 거래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형성되는 관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상대의 조건이 있다면 '왜' 그 조건을 따지는 지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본인에게 상대의 스펙이 수단인지, 목적인지가 드러나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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