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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말씀 묵상-2020년

신명기 29-31장 말씀 묵상

31장 후반부를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땅에 들어가면 자신을 잊어버릴 것을. 하나님은 그걸 모세와 여호수와 시절부터 이미 알고 계셨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을 기억할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사실이 먹먹해졌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아심에도 일어나도록 두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럴까? 우리는 100이 되지 않는 시간을 살지만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막거나 일어나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개입하시기 시작하면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게되고 우리는 로보트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일을 이렇게 바로 잡으면 다른 곳에서 구멍이 날 것이고, 그런 연쇄효과들은 결국 그 끝에 가서 하나님이 인간을 장기판 위의 말처럼 다루는 현상을 야기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걸 원하시지 않으신 것이다. 사랑이 무엇일까? 자유다. 사랑은 상대를 신뢰하고, 믿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게 사랑의 궁극적인 경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심지어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 경지에 이른 자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지만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계속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유의지로 하나님 앞에 오시길 기대한다. 그래야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 땅의 부정의함과 하나님을 떠나는 것들을 보고도 일단 그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거시적으로, 큰 틀에서 보면 그 역사가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대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나는 발견한다. 사람들은 이 땅의 부정의함과 악함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500년, 아니 100년 정도 전으로만 돌아가봐도 인간이 사는 세상은 훨씬 더 악했다. 인종이 다르다고 노예로 삼고, 투표권을 주지 않고, 신분에 따라 다르게 여기고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 상대를 몰살하기 위해 그 문화를 어떻게든 없애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 불과 100년 전이다. 히틀러와 일제가 했던 만행은 끝난지 아직 100년도 되지 않았다.

지난 100년간 인류는 모든 먄에서 그전까지 인간이 이뤄온 변화보다 더 큰 변화를 이뤄냈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시되기 시작했고, 신분제가 상당수 국가에서 폐지되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성경에서 구약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이념이 전세계에 퍼지고, 적용되고 있다. 100년, 길게 잡아야 200년 안에 이뤄진 변화들이다. 그리고 전세계의 대부분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 우리의 미시적인 현실에는 여전히 어려움과 부정의와 고통이 있지만 거시적인 흐름은 결국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위에 구현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신이 있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신이 가짜고 다른 신이 있다면. (일단 신이 여럿인 건 말이 안된다. 그럼 그 신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고 있을까? 기독교가 이렇게 확장되고 기독교적 가치가 구현되는 것을?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근대국가의 기본질서에 대한 공부와 연구는 모두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 16-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사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종교개혁이 일어난 가치가 확산되지 않으면 우리는, 한반도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조선시대는 보통 인구의 30%, 많을 때는 50%가 노예였다고 한다. 어느 한국학 학자는 조선시대는 실질적으로 로마시대와 같은 노예시대로 평가할 정도로. 우리는 여전히 그런 지옥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작은 날개짓이 지금 전세계에 있는 여러 가치들을 만들어내는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그게 우연이라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엄청난 믿음에 기반한 것이고, 기독교에서 전제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다른 신이 전제하는 절대자가 맞다면 그 절대자는 참으로 무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적 가치가 이렇게 확산될 수 있도록 용인하고 있다니...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도 버티고 계신 것이다. 기다리면서. 자식이 없어서 자식이 부모를 배신하고 떠나면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하물며 형제가, 친구가 나를 그렇게 떠난다고 상상해보면 그것도 상상만으로 고통스러운데 자식이 그러면 그 마음은 더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고통을 수억, 수십억배 감당하면서 인간을 지켜보며 인도하고 계신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헤아려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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