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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연애 그리고 결혼/연애

연애와 스펙

스펙이 좋았던 시절

스펙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스펙이 어떻게 변하냐고 하겠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성이 평가하는 스펙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스펙은 그 사람의 나이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 괜찮은 대학을 나와서,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다니고 싶은 좋은 직장에서 단 한 번도 10위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는 직장을 다니다가 좋은 대학원에 진학할 때까지가 20대 후반까지 나의 삶이었고, 그러다 보니 30대 초반까지 난 사실 소개팅을 부탁하기보다 거절을 하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교회 다니는 남자들이 많지 않다 보니 그때까진 마음만 먹으면 소개팅을 할 수 있었다.

20대 중후반에는 사실 그런 내 상황이 불편했다. 이는 내 스펙을 듣고 소개팅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스펙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때로는 내가 느끼고, 내가 아는 나 자신보다 나를 과대평가하고 소개팅 자리에 나오는 경우들도 있었고 때로는 소개팅 자리에서 나보다 나의 배경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스펙을 갖고 있는 것이 항상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난 상대에 대해서 호감이 가는데 오히려 상대가 '저런 배경을 가진 사람은 나를 함부로 대할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처음부터 내게 벽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난 상처를 많이 주고, 많이 받아 왔다. 아무래도 난 항상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주로 어울리다 보니 주위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얘기들을 소개팅 자리에서 했고, 상대방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내 말에 상처를 받기도 했었다. 또 그와는 반대로 소개팅에 나온 사람이 내 스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당신은 000 학교를 나왔고 연봉이 000이니까 000할꺼잖아요'라는 말을 때로는 직접 들어야 했는데, 그 선입견과 평가, 판단으로 인해 나도 상처를 받은 적들도 있다.

사실 나라고 상대의 스펙을 놓고 따졌던 시간이 없었겠나?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런 스펙들은 대부분 내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이런 사람을 만나보니 이게 이렇게 작용하고, 저건 저렇게 작용하니 이런저런 것은 따져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면서 소개팅의 조건이 하나둘씩 생겨나고는 했다. 그래서 사실 언론에서 가끔 비슷한 직종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그들만의 리그'라고 표현하는 게 아주 편하지는 않다. 이는 내가 아는 고스펙의 사람들 중에는 스펙을 위한 스펙을 따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으로 감정을 따라서 만난 이후에 여러 가지 경험으로 인해 스펙을 따지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스펙의 가치가 떨어지다 보니...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예상하지 못했던 박사과정까지 하게 되면서 내 스펙들은 그 가치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스펙은 내 나이대의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피대상이 되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지금 당장 모아놓은 자산이 뻔하고, 빚도 없지만 재산도 없는 남자. 어느 순간서부턴가 소개팅이 들어오는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소개팅을 주위에 부탁을 해도 잘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좋은 스펙'이라는 것이 관계에서 갖는 의미, 그리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은 사실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이 서로 공감대와 신뢰를 형성하고, 서로를 이해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펙을 보는 것이라면 난 스펙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공감대는 사실 두 사람이 초기에 친밀감을 형성하기에는 유용하지만 스펙 자체가 그 관계를 유지시켜주지는 않는다. 이는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도 그 디테일들에는 차이가 엄청나게 크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비슷한 면만큼이나 다른 면도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직종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일정기간 이상 듣고 있다 보면 그 영역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되고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사실 두 사람이 공감대와 신뢰를 형성하는데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스펙을 중심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며 연애 혹은 결혼상대를 고르는 경우, 2세의 머리가 좋아야 한다거나 상대의 돈과 집안을 이유로 스펙을 보고 선택하려는 경우에는 상대의 그런 배경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상대의 스펙이 본인보다 훨씬 우월하다면 그건 오히려 본인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그 차이로 인해 본인의 혼인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 중 한 명이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절대로 행복하거나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자랄 수 없다.

사실 나 역시도 그런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상대방의 스펙을 따진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일이 좋은 사람이고, 내 마음이 가는 방향이 있는 사람인데 그걸 들어주고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아져 버렸단 것이다. 사람들은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짝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아'라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 앞에는 '나이가 든 만큼 돈도 있고, 사회적 기반도 탄탄하니까'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야 비로소 그 말은 사실이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 나이에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사실 연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함께 가정을 꾸릴 생각까지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스펙, 어디까지 봐야 하나?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예외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스펙이 주는 선입견과 다른 내면을 갖고 다른 삶을 살아낸다. 이는 그 사람이 가진 스펙이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그 외에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렇기 때문에 스펙이 좋은 사람들도 짝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본인이 스펙이 좋고 그에 따라서 소개팅도 자주 들어오며, 본인이 호감을 느끼는 상대를 소개팅에서 만난 적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본인의 스펙이 아닌 본인 개인이 가진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펙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성이 무조건 당신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스펙상으로는 크게 우월하지 않더라도 정말 괜찮은, 좋은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이 존재한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스펙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연령대를 기준으로 실패를 많이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스펙이 화려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겸손하고 착한 경우는 굉장히 많다. 그리고 내 주위에서 대한민국 상위 0.X%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사람이 착하더라도 실패해보지 않음으로 인해 형성되어 있는 벽을 만들고 있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따라서 본인이 스펙이 안 좋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도 없으며, 만약 본인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본인의 스펙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펙이 부족하더라도 좋은 사람과 연애하고 좋은 가정을 꾸린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난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 스펙은 어디까지나 참조자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스펙 혹은 배경의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이 잘 맞지 않을 수 있고, 점점 소개팅을 하는 것 자체가 피곤해지는 과정에서는 스펙이나 배경을 어느 정도는 고려할 수 있다. 아니 그 정도는 고려하는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스펙을 따지는 것은 확률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니까. 그런 맥락에서 스펙을 따지는 것을 비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혼 후의 생활, 상대방의 지적능력 등까지 따지면서 스펙을 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는 듯하다. 이는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은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고, 좋은 대학을 나왔는지 여부가 그 사람의 지적능력을 입증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난 실제로 좋은 대학을 나와서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지혜는 없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평가가 처지는 대학을 나왔어도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도 많이 봤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만나봐야 안다. 따라서 상대의 스펙 혹은 배경은 자신이 상대를 편하게, 선입견을 갖지 않고 대할 수 있는 수준인지 정도의 '예선 통과'로 여기고, 일단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만나보는 게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에 나보다 한참 어린 한 동생이 본인은 솔직히 000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가진 사람은 만날 자신이 없다고 말하면서 내게 나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도 괜찮겠냐고 물어보더라.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실제로 괜찮다. 상대가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사람이고, 스펙은 그 사람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써의 의미만을 갖는다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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