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이 말씀과 관련하여 한국어 성경에는 '시험'이라고 되어 있는 표현이 영어로는 tempted이다. 이게 왜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을까?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본인이 힘들 때면 그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본인의 믿음을 시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다보면 세상과 부딪힘으로 인해 생기는 고난]이지 그런 어려움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영어로 된 표현을 보니 이 생각이 더 확신에 가까워진다.
(성경적 지식이 부족해서 이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쓰지 못했지만, 신뢰하는 목사인 친구가 준 피드백을 참고하여 보완하자면, TEST로써의 시험을 의미하는 부분들도 있지만) 한국어 성경에서 이 부분에 시험으로 표현되는 것은 영어 성경에 의하면 '유혹'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당하셨던 것과 같은 유혹 말이다. 즉,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끌리고, 우상으로 삼을 것들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하나님을 1순위로 놓고 살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 너희가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만 허락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란 것이다.
사실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이란 것 자체가 어찌보면 이상한 개념이다. 어려움은 사실 상황으로 통해 오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마음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의 마음의 상태나 문제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야기하시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한 바퀴를 돌면 그것도 결국 고통과 어려움을 연결해서 해석할 수는 있다. 이는 우리가 고통스럽고 힘든 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인가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고, 갖고 싶기 때문인데,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우린 사실 더이상 힘들지 않을 수 있다. 즉,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서 힘든 것은 무엇인가를 갖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인데, 우리는 능히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 포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더이상 고통스럽거나 힘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핵심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 상황의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에 있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더 이상 힘들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욕망과 욕구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로 객관적으로 고통스러울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세상에 누군가는, 아니 어쩌면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가 욕구하고 욕망하는 그것을 갖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고, 그걸 갖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도 아니다.
까미노를 걸을 때 흠칫 놀랐던 적이 있다. 난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한 달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인생에 정말 필요한게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현실로 느꼈다. 그래서 난 지금도 무엇인가에 대해 욕구와 욕망이 올라올 때면 그때를 떠올린다. 그런다고 나의 욕구와 욕망이 즉시 가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머리로는 깨달아 알게 된다. 내가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You cannot drink the cup of the Lord and the cup of demons too; you cannot have a part in both the Lord's table and the table of demons. (고린도전서 10장 21절)
혹자는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고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느냐고.
맞다. 인간은 그럴 힘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할 때만 그럴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 돌아오는 평강함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평강함을 누리는 방법과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는, 평강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와 예시들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것도 추구할 수 있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그럴 수 없다고, 그게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만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것이다.
'Everything is permissible'-but not everything is beneficial. 'Everything is permissible'-but not everything is constructive. (고린도전서 10장 23절)
담배를 피워도 될까? 술을 마셔도 될까? 혼전순결을 지켜야만 할까? 성경의 답은 명확하다.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하는,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행위는 없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또는 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존재한다. 율법은,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결국 그걸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Nobody should seek his own good, but the good of others. (고린도전서 10장 24절)
이런 말씀을 읽으면 가끔 '그럼 내 것은 누가 챙기나! 누가 챙겨주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것은 하나님께서 챙겨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것을 챙겨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For man did not come from woman, but woman from man; neither was man created for woman, but woman for man...In the Lord, however, woman is not independent of man, nor is man independent of woman. (고린도전서 11장 8-9, 11절)
남자들은 이런 말씀을 본인이 집안의 머리니까 따르고 순종하라는 식으로 악용한다. 지네들 멋대로(오해하지 말자. 나도 남자다).
그런데 머리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누군가를 복종시키는, 상위의 개념이 아니다. 머리가 된다는 것은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가 어떤 역할을 하나? 모든 것이 머리에서 시작되지 않나? 그만큼 머리가 되는 것은 곳곳을 살피며 보살펴야 한단 의미기도 하다.
그리고 성경은 남자를 위해 여자가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나? 그건 여자를 자신의 물건처럼 함부로 대해도 된단 것이 아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이 여자 덕분에 현실에서 버텨진단 것을 기억하면서.
인간에게, 아니 이 세상 어디에도 피조물들 간에는 상하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린 각자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역할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 내용은 오늘 말씀 뒷부분에 나와 있는데, 그건 너무 길어서 글에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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