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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고난과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사람들이 말하는 고난에 대한 내 정의와 비판은 이렇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 중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밀어넣고 힘든 상황을 감당하게 하시는 경우는 매우, 극히 드물다. 우리가 말하는 고난 중 상당수는 그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우리의 욕망과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으로 인한 불만, 분노와 힘듬이지 그게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으로 밀어넣으실 때도 있다. 뭘해도 안될 때가,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께서 다 막고 자리를 지키게 하실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광야의 시간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몰아넣지는 않으신다. 그것을 감당할 힘이, 준비가 된 사람들,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롯이 하나님만 따르려는 의지가 충만한 사람들에 한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구석에, 코너에 몰아넣으신다. 성경에 나온 모든 인물들이 그런 과정을 겪은 것은 아니란 것이 그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란 것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본인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필요도 없지만, 또 자신이 조금만 힘들면, 뭔가 본인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무조건 이게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라고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그렇게 힘든 것은 본인이 욕심과 욕망이 너무 크고 많아서 경험하게 되는 것일 확률이 훨씬 높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왜 어떤 이들은 그런 상황으로 몰아가실까? 그건 어느 누구도, 세상 속에서 사는 어느 누구도 그런 과정을 경험하지 않고는 세상 속에서 오롯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과정을 겪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데, 그나마 그런 과정을 지나야 벗어났다가도 관성적으로 하나님을 다시 보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이 대부분이 자신만의 고립된 광야의 시간을 경험해야 했던 것도 그 떄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들을 그런 구석으로 몰지 않으시는 걸까?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추측하건대 그게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계획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난 모든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계획이, 성향이, DNA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걸 강요하진 않으시고, 우리가 선택을 통해 그 계획을 구현해 내길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또 우리가 그걸 구현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현해내지 못했다고 벌하실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계획상, 하나님께서 그 개인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과 과정상 조금 더 거칠고, 세상과 부딪혀야 하거나 더 많은 사람을 품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이 준비되었을 때 그런 훈련의 과정을 하나님께서 들어가도록 하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더 잘나거나 탁월하다거나 큰 일을 한다고 착각하면 안되는 것은 그건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것이지 본인의 힘과 노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물론 본인의 힘과 노력도 들어가 있겠지만 그 힘과 노력 또한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것이 있기 때문에 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크고 작은 일은 없다. 100마리 양 중에 한 마리의 양을 잃어도 그 한 마리를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셈법은 우리와 다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셈법이 이상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한두 사람을, 눈에 보이는 숫자대로 세지만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세계는 그 사람에겐 온 우주가 아닌가? 그렇다면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은 하나의 우주를 구하는 것이고, 우주는 그 크기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실 숫자와 크기가 중요하지 않아야 한다. 숫자와 크기에 집착하는 한국교회가 잘못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의 셈법이 아니라 세상의 셈법으로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냥 문득, 그런 패턴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상하게 부부사이가 좋은 사람들이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 듯한 패턴을. 사람들은 그 패턴을 놓고 하나님께서 왜 안주시냐고, 심하면 벌 받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봤는데, 그게 말이 되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 부부는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붙들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아이를 소망하지만 없는 상황이 그들이 오히려 서로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둘이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허락하시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내 자신에 대해서 얼마 전에 깨달은게 있다. 난 내가 되게 외롭고 절대 혼자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삶을 돌아보니 난 혼자서도 꽤나 잘 사는 사람이었더라. 난 누군가와 일적으로나 사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같이 하기보다 혼자 하는게 더 편하고 좋은 사람이었더라. 내가 혼자 있어도 잘 버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직까진 혼자 두신 것일 수도 있겠다고, 혼자 있으면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두시는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거나 아이를 갖지 않겠단 것은 아니다. 내 안에는 20대 때부터 가정에 대한 소망함과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는데, 그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또 나 혼자 늙어갈 수도 있다. 그냥 그건 모르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고, 맞는 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 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내가 짝을 찾기 위해 들인 노력을 다 설명하면 누구도 내게 감히 '너가 노력하지 않았다'거나 '기준이 너무 높다'고 하진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짝을 찾는 건 내 힘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다.

여담이지만, 기독교인들이 가능하면 이혼은 하지 않고 서로 맞춰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정과 결혼에 대한 소망함과 욕심과 욕망이 엄청나게 컸던 내 경험상,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내가 상대를 평생 파트너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마음이 들게 하신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두 사람은 가능하면 자신을 돌아보면서 맞춰나가는게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두 사람이 그 과정을 같이 가야 하고, 정말 감당이 되지 않는 시점에는 갈라선다고 해서 그게 반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는거니까.

너무 멀리 온 느낌이긴 한데... 암튼 우리는 이런 작은 디테일들을 잘 분별하면서 살아야 진짜 기독교인, 기독교인 다운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저 유신론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