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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인문학과 경전 없는 신학, 종교학의 위험성

우리나라 교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성경 본문을 떠나서 '썰' 중심으로 모든 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나라 뿐 아니라 대부분 나라에서는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고찰과 경험론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종교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 느낌이다. 성경을 매우 단순화 해서 정의하면 구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인도하셨는지에 대한 내용이고, 신약은 예수님과 그 이후에 복음이 전파된 경로, 그리고 그 이후 복음 전파에 대한 내용이다. 교회에서는 보통 이 프레임으로 설명을 한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구약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든 절대자가 인간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시고 왜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구약은 인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은 인간 본성을 중심으로,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밖에 없다. 창조론은 이 세상이 얼마 만에 만들어졌는지에 핵심이 있는게 아니라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압축적인 해설이고, 그 이후 구약의 내용들은 사실 그걸 예시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약은 그런 인간의 본성과 모습을 전제로 하고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하시고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 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구약은 [너희 안에 있는 여러 모습은 이렇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대한단다]라고 하나님께서 설명해주시는 설명서라면 신약은 [너희는 이런 마음을 갖고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지침서에 가깝단 것이다.
물론, 이게 이렇게 단순하게 일도양단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지만 굳이 단순화 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그렇단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위험할 수 있는 지점도 있으나 이 계정 페친들은 전부 교회에 다닌다는 점, 이 글이 무한정으로 길수도 없고 논문도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서 일단 이렇게 정리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들의 정말 큰 문제는 성경에 대한 인문학적인 관점을 갖기는 커녕 성경 자체에서도 떠나 있는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물론, 주일마다 말씀 본문을 대고 거기에 대한 설교가 이뤄지기는 한다. 하지만 대부분 교회들의 설교는 그 말씀과 당시의 배경, 하나님이 어떻게, 왜 그렇게 일하셨는지 등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성경이 없더라도 할 수 있는 얘기들을 한다. 그게 과연 [기독교]의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보니 한국교회에 불만을 갖거나 한국교회에서 상처받은 이들은 성경중심으로 해석하는 이단을 따라가거나, 성경을 읽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으니 성경을 읽고 고민하고 묵상하기보다 종교서적, 신학서정이나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신에 대해 고민한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위험하고 잘못된 것은, 그런 책들은 정말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법학을 좋아하는 것은 법학은 어쨌든 기초를 둔 [법률]이란 것이 존재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논의와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종교의 경전을 세세하게 들여다 보지 않고 신은 이렇고, 저렇고 이 종교는 이렇고, 저렇고 하는 말을 하는 건 [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책들은 [신학]이나 [종교학]이란 탈을 쓰고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이 자기과시를 하는 책들에 불과하다. 근거와 기초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학]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방구석에서 세상을 보면서 자신의 논리와 이론으로 세상을 논하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현실을, 일반 성도들이 현실에서 어떤 상황에서 일하고, 어떤 마음을 갖는지를 모를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신학과 종교학만을 공부해 온 사람들도 그런 목회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그들은 더 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목회자들은 그나마 성도들을 통해 현실에 대한 접점이라도 있지만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신학과 종교학자들은 방구석에서 논문을 읽고 성경을 미시적으로 돋보기를 들여다 보기만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말이 일리가 있던 시기도 있었다. 세상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을 때,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프레임이 보일 때,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가 사회구조의 큰 부분을 차지할 때는 그들의 인사이트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사람들의 감정도 뒤죽박죽인 시기에, 더군다나 심리학, 정신의학과 같은 학문과 과학이 발달되었고 종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은 국가 시스템 하에서 그런 사람들의 말은 깊이가 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로스쿨에 다니면서도 느꼈던 것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깊게 파고 드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괴리되어 논리적이고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만 현실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말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더라. 극소수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대부분 연구실에서 자신의 논리회로만 돌리신 분들이었고, 그런 분들은 자신의 분야가 다른 분야와 접점을 갖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놓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큰 그림은 보지 못하는 사람드링 되고 만 것이다.
경전과 인문학 없는 신학과 종교학의 가장 큰 위험은, 그 끝에는 해체주의와 다원주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이건 신학과 종교학의 어쩔 수 없는 결론이다. 그걸 그렇게 진지한 척 고민해서 길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이, 이건 상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고? 아니, 우리가 신을 볼 수 있는게 아니지 않나? 우리가 신이 이런 존재라고 [이성적으로] 추론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전제하고, 그에 대한 명확한 토대를 쌓고 난 후에 논의해야 한다.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게 설명되어야 할테니까.
그리고 어떤 종교가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 종교의 경전 [본문]을 보고 해석해야 한다. 특정 종교의 인간관과 삶에 대한 방향성,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내용은 그 종교의 경전에 써 있으니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경전을 본다는 것은 물론, 미시적으로도 봐야겠지만 거시적으로 큰 그림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맥락적으로 그 안에서 작은 디테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QT집을 갖고 말씀을 토막내서 읽고 거기에서 어떻게든 시사점을 뽑아내고 묵상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한국 교회의 비극은 어쩌면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구약과 신약 전체, 그리고 읽고 있는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왜 그렇게 쓰여졌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읽고 해석하니 성경이 왜곡될 수밖에 없지 않나?
개인적으로 법학을 공부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항상 근거를 갖고, 발을 땅에 붙이고 사고하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법학을 공부한 것이 내가 성경 본문을 더 많이 읽는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나도 사실 법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과연 말씀을 지금처럼 통으로 읽으려고 몸부림치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 몇 번 읽고 큰 그림을 갖고 있지 못하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고, 남의 민족 역사를 내가 왜 읽고 있나 싶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걸 설득해내려면, 성경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종교가 자신의 삶과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종교를 갖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은 개신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그런 시선으로 자신들의 경전을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접근한다면, 진리가 조금 더 명확해지고, 드러나고,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접근해서 깊게 들어가면 왜 개신교적 관점이 진리일 수밖에 없는지도 설득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브런치에서 그 작업을 시작했는데, 구독자도 잃고, 나도 엄청 피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시작이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번 달에 시작했다. 그 작업이 아무 의미도 없지는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