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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단편적인 생각들

익명, 댓글과 트라우마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다. 아직까지도 이번 주에 당했던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브런치라는 플랫폼 안에서 당한 트라우마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저께 썼다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발행 취소한 [댓글을 삭제했다]는 내용의 글에서 언급한 사람이 지인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왜 발행 취소를 했냐고? 그 글은 댓글 쓴 사람을 그래도 존중하는 의미에서 쓴 것인데 그 사람은 존중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심지어 올해 초에 내 유튜브에도 내가 [자의식 과잉]이라며 비난하는 댓글을 썼었다. 어떻게 아냐고? 그걸 쓴 사람이 이번에 새벽 4시까지, 아 본인은 한국에 있지 않으니 나만 새벽 4시였던 시간에 말꼬리를 잡고, 트집을 잡으며 댓글을 쓴 아이디와 같은 아이디였기 때문이다. 오롯이 비난하기 위해 글을 쓴 당일에 만든 계정이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내가 브런치에서 계정을 차단하자 탈퇴했다 가입하기를 반복하면서 댓글을 달았다 글에 좋아요를 누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탈퇴 후 재가입만 3번째 하고 있더라. 이 글에 댓글을 닫은 것도 이 글에도 댓글을 달았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이 모든 게 나의 잘못된 대응 때문이었다는 댓글이었다. 내가 댓글을 삭제했던 것은 맞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적 내용이 본질과는 무관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 댓글들이 상대를 무시하고 비아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는 말꼬투리를 잡으며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댓글을 달더라.

내가 본인을 특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내가 아는 사람임을 드러내 놓고 과시하듯 비공계 계정인 내 인스타 스토리의 해시태그를 브런치 댓글에 그대로 쓰는 대범함까지 보낸 그 악플러는 본인이 악플러가 아니라 '문제 제기'를 했을 뿐이라고 했다. 시작은 분명 그랬다. 하지만 그 후에 말꼬투리를 잡고, 그렇게 사는 당신의 인생이 불쌍하다는 식의 언급을 이어가고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4시간 넘게 카톡 하듯 댓글을 단 것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악플러의 패턴이었다.

악플러인지 여부는 겉으로 드러나는 댓글의 '내용' 뿐만 아니라 그 패턴과 뉘앙스를 통해서 판별해야 한다. 내용만으로 악플러인지 여부를 판별한다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집착하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데 너는 왜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거냐'라고 계속 연락하고 따지는 사람은 선플러란 말인가? 내용이 사랑한다는 거니까? 그건 말이 안 된다.

내가 [객관적인 사실]과 다른 내용을 쓴 적이 있단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건 의도를 가진 적극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13년 전의 체지방 수치를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고, 새벽에 비몽사몽 중에 피곤해서 감정적으로 댓글을 쓰다가 신고해야 할 정도의 욕설과 비난이 담긴 댓글을 삭제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항상 모든 걸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의 사람으로 전제해 주는 것은 고마운데, 난 그 정도로 머리가 좋고 완벽하진 않고 실수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들을 인정했고, 사과했다. 그랬더니 그에 대해서는 핑계를 대고 있네, 손발이 오그라드네, 그렇게 사는 당신이 불쌍하고 연민하게 된다는 식의 댓글을 다는 것은, 내 체지방 수치가 달랐던 것은 맞지만 본인이 들이민 수치는 여전히 선수급이었던 게 '객관적으로' 증명된 후에는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은 얼마나 당당하고 정상적인 행동일까?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이게 악플러가 아니면 뭘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과거의 일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올해 초에 유튜브에 댓글이 달렸을 때도 '내가 정말 자의식 과잉인가?'라는 생각에 나와 가장 친한, 내게 직설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지인들에게 '내가 자의식 과잉적인 면이 있어?'라고 물어보는 정도로 며칠 정도 힘들었다면 이번 일의 충격은 그보다 훨씬 컸다.

어제는 너무 바빠서 그 일이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오늘 조금 여유가 생기니 그 일이 머리를 떠나지를 않는다. 지금도 그 댓글들을 보면서 느꼈던 가슴 두근거림과 두려움은 브런치에서 새로운 알림이 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계속된다. 그것보다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그게 내 지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누구인지 몰랐을 때, 후보군을 추린 후에도 그중에 누가 달았을지를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동생을 의심하게 되었고,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형도 믿지 못하게 된 상황이 고통스러웠다. 이번에는 그나마 후보군을 추려낼 수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지인인 것을 알게 됐는데 후보군이 수 십, 수 백 명 중 한 명이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만약 그랬다면 나는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아무와도 만나지 않는 삶을 평생 살며 가면만 쓰고 살게 됐을 수도 있다. 본인들이 맞아도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을 알다 보니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설마 너는 아니지?'라고 물어야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게 느껴지면서, 그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고통스러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익명 뒤에 숨어 손가락을 놀리는 사람들을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논문을 쓰기로 했다. 올해 안에는 쓰지 못하겠지만 내년에라도. 익명 뒤에 숨어 손가락을 놀리는 것이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지 않나? 살아는 있지만 모든 순간이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아무도 믿지 못해 혼자 고립되어 살아간다면 그게 어디 살고 있는 것인가?

오늘 아침에 루틴대로 운동을 하다가 문득 '나와 제대로 깊은 대화는 단 한 번도 해보지도 않았고, 직접 만난 지도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내가 한창 몸을 만들었을 때의 모습은 물론이고 내 운동패턴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자의식 과잉이고 아집이 세다고 느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이 접할 수 있는 나의 모습만 보면 그럴 수는 있겠다 싶더라. 나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설프게, 주로 간접적으로 접했으니까.

그렇다면 면전에다 대고, 직접 인스타 DM으로 메시지를 보냈으면 된다. 당신 너무 자의식 과잉이라고, 당신 아집이 너무 세다고, 당신 운동을 얼마나 제대로 하길래 아는 척하냐고 당당하게 따지거나 심지어 욕을 했어도 된다. 그랬다면 기분은 당연히 나빴겠지만 대화를 했을 것이다. 어떤 면이 그렇게 느껴졌냐고 물어보고, 듣고, 해명이 필요한 부분은 해명하고 내가 잘못된 부분은 받아들이고 반성했을 것이다.

그런 시도를 하기는커녕 방구석에 앉아 관찰하면서 본인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고 비겁하게 익명성 뒤에 숨어 비난을 하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 상대를 그렇게 대했을 때 상대가 겪게 될 고통과 불안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쏟아내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이미 잠들어 있는 시간에 피곤에 찌든 상태에서 잠들려고 하는 와중에 달린 댓글에 어쨌든 계정 주인으로서 예의를 다하기 위해 비몽사몽 중에 답을 단 내용들을 비아냥거리고 본인만의 우월감에 취해 공격하고 트집 잡고 말꼬투리 잡는 건 존중할 가치가 없는 짓이다. 그러면서 왜 댓글을 삭제하냐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존중할 필요가 없으니까.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라도 얼굴을 보고 하면, 본인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하면 받아줄 수 있다. 거기에서 끝나니까. 그런데 익명 뒤에 숨어서, 본인이 누군지 드러내고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런 걸 쏟아내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누가 쓴 건지 모른다는 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썼을 수도 있단 거니까… 그러하니 어떤 형태로든 인터넷에서 글을 쓸 때는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만 생각해 보고 썼으면 좋겠다.

만약 지인이 아니었다면, 본인도 당하는  두려워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활동하던 와중에 그렇게 달기 시작한 것이라면 이해라도   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알고, 직접 연락할 방법도 있으면서 이렇게 하는 ... 누가 뭐라고 해도 정당화될  없다. 그건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불안하고 고통스럽다. 그걸 이겨내기 위해 이 글을 쓰고 발행한다. 글은 계속 써야 하니까.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서.

실패를 거듭하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자주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  모습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필터로 상대를 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패턴이 비슷하더라. 다른 사람의 다른 행동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필터로 보고 해석하더라. 빨간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불타는 것처럼 보이듯이... 어떻게 아냐고? 내가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지금도 주위에서 보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다르냐고? 그건 나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내게 부정적인 얘기를 하면 친한 사람들에게 내가 정말 그런지를 묻는다. 내가 괴물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잔여물이 남아있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믿지 못하기에 항상 의심하고, 돌아보고, 반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당신이 지금 누군가를 비난하고 증오한다면, 그게 정말 상대의 모습인지 아니면 본인 안에 그런 게 있어서 무고한 사람을 그 필터로 보는 것인지를 돌아보길 바란다. 좀비는 자신이 좀비인지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