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제를 해야 하는 게 있다. 나는 인복은 꽤나 있는 편이다. 나를 존중해주고, 내 이력과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적지 않다. 이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통상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나의 소위 말하는 '스펙'이과 이력이 많이 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단단해 보이고 심지어 오버스펙으로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는 운이 좋게 무시나 괄시를 당하지 않고 일을 받을 수 있었음을 전제로 깔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운이 좋은 건 아니고, 나처럼 인복이 있는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이 글의 내용이 해당하는 것은 아님을 전제로 까는 것은 그런 경우의 사람들에게는 이 글에서 내가 돈을 좀 적게 받고 일하는 이유가 상처가 되거나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들의 목록은 이렇다. 비용이 지급되는 일들은 정부 정책연구보고서에 공동연구원으로 참여, 유튜브 영상 제작 및 채널 운영, 드라마 보조작가, 홍보 또는 마케팅 글 작업까지. 여기에서 일단은 고정으로 비용이 들어오는 건 유튜브와 드라마 관련 작업이고 나머지는 프로젝트에 따라 일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중에 돈을 일반적인 경우보다 적게 받고 일하는 건 지인의 유튜브 채널 영상 제작과 운영에 대한 비용 정도. 대신 그 채널의 주인인 형을 내 채널에 무상으로 출연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출연, 기획, 촬영, 편집, 채널 운영까지 하니 사실 정말 사업과 비용적으로만 따지면 여전히 적게 받는 편이지만 그에 대한 불만은 없다. 심지어 내가 그렇게 받겠다고 얘기했으니까.
내가 스스로 받는 돈을 줄인 건 처음이 아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지인의 회사에 정규직으로 들어갈 때도 제시받은 연봉에서 600만 원을 줄이고 들어갔었다. 지인의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지인과 처음 창업한 친구의 연봉이 내가 제시받은 것보다 600만 원이 적었고, 회사 구성상 내가 그 친구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 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연봉을 줄였다. 그 결과 내 계약 연봉은 그때 기준으로 10년 전에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회사에서 받은 연봉 수준이었고, 그 회사에서 받았던 보너스와 다른 복지와 비교하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몸값이 떨어진 것이었다.
내가 항상 스스로 받는 돈을 줄인 건 아니다. 나도 말도 안 되는 계약조건을 제시받고, 여러 고민 끝에 그 조건을 받아 든 적도 있다. 드라마 보조작가로 처음 계약을 할 때 여러 가지 상황적인 이유와 나의 근무형태 등을 이유로 보조작가들이 받는 비용의 절반을 제시받았다. 당혹스러웠다. 법학박사로서의 지식을 활용하는 작업이었는데 그 전문성을 인정받기는 커녕 안 그래도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지급하는 거로 널리 알려진 보조작가들이 받는 비용의 절반 수준을 받으며 일을 하라니... 잠시 고민을 하긴 했지만 여러 이유로 그 조건을 일단 받아들였다.
그렇게 비용을 적게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지인과 연관되어 있었고, 그 지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나와 일하는 지인들은 내가 '객관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비용을 받고 일한단 것을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내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 관여하는 유튜브 채널과 관련해서는 채널 주인이 내가 하는 일에 거의 터치가 없고, 연봉을 줄이고 들어간 회사에서는 애초에 얘기된 조건이 주 4일 출근이었으며, 보조작가로 일한 첫 작품의 경우 작가님이 나를 회의에 거의 부르지를 않으셨다. 몸값을 줄인 대신 자유를 더 얻은 것이다.
내가 받을 비용을 다 받았다면 어땠을까? 상황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유튜브 채널의 경우 영상물의 퀄리티 등에 대한 피드백도 늘어나고, 재편집도 많이 해야 했을 것이고 기존 회사 구성원의 넘버 2보다 내가 연봉을 많이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내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회사 대표도, 나도 내가 그 회사에서 평생 있을 것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건 상호 간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나는 그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1년 정도 일한 후에 정규직으로 들어갔었는데, 정규직이라는 신분이 주는 무게와 그로 인해 생기는 변화들이 나를 잡아먹어서 나는 3개월 정도 일하고 회사를 나왔다. 내가 처음 제시받은 비용을 받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설사 나왔더라도 대표와 관계가 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나온 후에도, 엄청 긴밀한 관계는 아니지만 작년에도 그 회사로부터 일을 받을 정도로 불편하지는 않은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스스로 몸값을 낮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서 유튜브 채널과 보조작가 계약은 '투자와 경험'이라는 요소가 더해졌었다. 유튜브의 경우 내가 그 형 채널만 운영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형 채널 전반을 관리, 유지하는 건 내게 경험이 되어 내 다른 채널을 오픈하고 다른 지인의 채널 여는 걸 논의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줬다. 드라마의 경우 그 작품 이후로 나는 두 개의 작품에 보조작가로 계약을 했고, 지금도 그중 하나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 두 작품에서는 모두 기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면서 일반 보조작가들과 같은 계약조건으로 계약을 했었다. 애초에 첫 작품은 투자이자 그 업계에 발을 들이기 위한 비용으로 생각했기에 그런 면에서 첫 계약에서 덜 받은 비용은 나름 성공적인 투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업계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굉장히 인복이 있는 편이다. 그리고 사실 스펙과 이력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기 힘든 지점들도 갖고 있는 편이기 때문에 운이 좋았던 면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다 '몸값을 낮추면 자유가 찾아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좋게, 좋게 말하고 심지어 지인과 일을 하는 경우에도 주는 비용에 비해서 말도 안 되는 업무량과 부담, 책임을 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로 인해 친했던 사람들이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로 갈라서는 경우도 봤기 때문에 몸값을 낮추는 게 항상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어느 정도 이상의 신뢰가 있고, 그 일을 하는 것이 투자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하면 한 번쯤은 금전적인 보상을 어느 정도는 타협하고 가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단호해질 필요도 있는데, 나는 실제로 드라마 보조작가 계약의 경우 '시작은 일단 지난 작품과 같은 조건으로 하고, 제작과 편성이 확정되면 올려 받는 건 어떠냐'는 얘기에 '그럴 거면 그냥 계약하지 않고 필요할 때 단발성으로 도움을 드리겠다'며 거절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내가 말한 하한선보다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할 수 있게 되더라.
항상 양보해야 한단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이력에 비춰봤을 때 어느 정도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될 때는 업계 처우, 나의 이력 등을 고려해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상대가 어떤 사람 또는 회사인지, 그리고 나의 가치과 경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이 항상 제일 어렵고, 또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지인이 아닌 사람이 지금 내가 관여하는 유튜브 채널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제안하면 나는 계약금에 더해서 업계에서 통상적으로 받는 비용에 내 출연료, 기획료를 별도로 따져서 비용을 정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몸값은 지금의 채널에서 받는 비용의 3-4배 이상은 될 것이고, 그 비용을 내고 나와 계약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걸 알면서도 그런 비용을 제시할 것은, 그 채널의 일에 투자하는 나의 '시간'은 그만큼의 가치는 있고 그 일을 함으로써 포기하는 나의 다른 일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가치'를 산정하는 게 솔직히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계약을 할 때마다 비용에 대해 말하는 게 항상 가장 어려웠다. 몇 달이 지나면 완전히 100% 프리랜서의 삶을 산지 4년 차. 이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산정할 수 있게 된 느낌이다. 이제야 프리랜서 다운 프리랜서로 살 준비가 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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