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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단편적인 생각들

익숙한 식당이 사라졌다...또

13년 째 다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근처에 있는 내가 쓰는 공유사무실 지점으로 향하는 길에 '뭘 먹지' 싶었고, 백반이 먹고 싶어 가는 길에 있는, 시청 근처에 가면 종종 찾았던 청국장 집에 가기로 했다. 작년 하반기, 4분기에도 갔으니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식당이 있던 가게는 문이 굳건히 닫혀 있었고, 간판도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학부시절에 인사동에서 굉장히 좋아하는 전통찻집이 있었는데, 회사를 다닐 때도 있었는데, 그후 2년이 조금 안되어서 오랜만에 찾은 인사동에는 그 찻집이 없었다. 그곳에는 예전의 인사동과는 어울리지 않은, 번쩍 거리는 한복대여점이 있었다. 그 자리를 한참 동안 뜨지 못했다. 화도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로는 오롯이 인사동을 가기 위해서 인사동을 찾은 적은 없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타고나기는 그렇지 않은 성향인데, 자유롭고 본인의 색이 분명한 사람인데 인생이 정답이 있는 것처럼 학습되었고, 장남이라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부모님의 요구에 굉장히 충실히 따르며 20대까지 살았다. 수험생활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재수를 하라는 부모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고, 대중교통 끊어지기는 집에 들어왔으면 좋겠단 말에 학부시절 내내 동아리 연주 뒷풀이 정도 외에는 항상 대중교통을 타고 귀가했다. 아예 모범생 DNA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렇게 바른 대학생활을 한 20대 남자는 거의 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 외국에 살았으니 교환학생은 갈 필요 없다는 말씀에도, 휴학은 하지 말라는 얘기도, 언론사 재수는 안된단 얘기에 생각도 없던 대기업 취업전선에도 나섰다. 

그래서인지 무엇을 하든지 보수성이 앞서는 편이다. 아니, 사실 그게 보수성인지 아니면 내가 워낙 생각이 많고 복잡하다 보니 생각 외에 다른 건 다 보수적으로 유지하는 게 편하고 좋아서 그렇게 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익숙하고 좋아하는 것을 잘 바꾸지 않는 편이란 것이다. 10년 넘게 스니커즈는 아디다스의 슈퍼스타만 신다가 재작년에야 다른 스니커즈를 신었는데 그건 내게 거의 혁명 수준의 변화였다. 난 10년 째 연 1회 이상 제주에 가지만 루틴이 생긴 후에는 갔던 곳을 가고, 옷도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같은 브랜드에서 비슷한 옷을 산다. 여름 티셔츠는 같은 옷을 두 가지 색으로 6장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렇다 보니 익숙한 것이 사라지면 느끼는 공허함도 다른 보통의 사람들보다 큰 느낌이다. 작년에는 제주에 있을 때 이틀 간 고민하다 산 컵을 실수로 깨자마자 그 컵을 샀던 공방에 전화를 해서 같은 구조의 컵을 주문했을 정도로 나는 기본적으로 큰 틀은 물론이고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가는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오늘 마음이, 그리고 머리고 복잡하고, 복잡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내가 마냥 보수적으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결정을 어떻게 내리면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여기까지 내가 털어놓은 고백 아닌 고백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는 나는 짜잘한(?) 결정과 환경들은 이렇게 보수적으로 유지하지만 정작 인생의 큰 결정들은 과감하게 틀을 깨면서, 고민은 많이 하지만 결국은 내 마음을 따라 가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큰 틀과 흐름,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방식을 아는 사람들은 나를 마냥 자유로운 영혼으로 여기기도 한다. 

전공 선택에 있어서도 그랬다. 나는 '사회계열'로 입학을 해서 1학년을 마치고 10개 전공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회사원과 회사원의 아내로 평생을 사신 부모님은 당연히 내가 경영학을 전공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전공 신청을 직접 하지 못하는 일정으로 입대를 하면서도 부모님께 1순위도 정치외교학과, 2순위도 정치외교학과를 쓰시라고, 나는 절대 경영학은 공부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졸업하기 전까지 경영학 과목은 단 하나도 수강하지 않았다. 

학부시절에 들은 수업들도 돌아보면 중구난방이었다. 기본적으로 교양과목은 잘 듣지 않고, 정치외교학 전공을 가장 많이 들으면서도 다른 전공의 전공과목을 교양삼아 들었다. 신문방송학, 법학, 경제학까지. 그러면서도 실속없게(?) 부전공을 할 수 있을만큼의 수업은 듣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이 어쩌다 보니 다른 전공의 전공과목이었고, 그래서 들었을 뿐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정말 '대학교육'의 취지에 맞는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나쁘게 말하면 취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휴학하지 않고 졸업하자 마자 취업이 된 게 기적일 정도로.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그런 기질들이 있기 때문에 법학박사를 받고도 브런치에서 글을 더 많이 쓰고, 드라마 작가팀 일을 하면서, 유튜브 채널도 몇 개를 돌리고 있는 게 아닐까... 꽂히면, 마음이 가면 해야 하는 성질머리를 타고 났기 때문에...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인 부모님 밑에서 나 같은 사람이 나왔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사실 두 분도 타고난 성향은 그렇게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대학시절 학보사 최초의 여성편집국장을 70년대에 하셨고, 아버지는 학부시절 머리를 기르고 나팔바지 입고 친구와 한강에서 소주 한 짝을 드시던 분이었다. 지금의 기준에서는 '그게 뭐 어때서?'라고 할지 모르나 두 분이 70년대에 그렇게 사셨다는 건 두 분이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순응적인 성향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두 분도 살기 위해, 생계를 챙기다 보니 보수성이 생기신 거지 그렇게 태어나신 분들은 아니었다. 

이 얘기를 주구장창 하는 이유는, 나의 보수성으로 인해 생긴 사라진 식당에 대한 아쉬움을 자유롭고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나의 성향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벌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것들을 기록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작한 유튜브 채널과 1년 넘게 방치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에서 내가 좋아하는 서울과 한국의 모습들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소스를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