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에 대한 설교는 대부분 그 뒤에 요셉의 삶과 결부하여 '결국 힘든 일도 쓰시는 하나님'으로 이어진다. 억울함을 당해도 참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에는 모든 것에 이유가 있다는 것으로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두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37장에서 요셉이 자신의 꿈을 얘기했을 때 형제들은 분노했지만 야곱은 그것을 귀 기울여 들었다는 37장 11절과 요셉의 이야기 사이에 갑자기 들어온 유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요셉이 자신의 꿈을 얘기했을때, 그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이때 철이 없을 나이였다. 그가 17살에 팔려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으로 따지면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다. 그 나이 때는 누구든 본인이 조금은 과시하고 싶어할 수 있다. 한창 사춘기 때가 아닌가? 그가 그렇게 자신의 꿈을 얘기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순진했단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잔머리를 굴리는 약삭빠른 자였다면 그것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얘기했을까?
그런데 그것을 들은 요셉의 형들은, 정확히 말하면 이복 형들은 분노하지만 야곱은 이를 기억했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새기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이 짧은 본문으로 대조시키는 구절이다. 하나님 안에서 거하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 이복 형들은 화를 내고 분노하면서 자신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에 대해 상상도 하기 싫었지만 야곱은 이를 말리거나 그런 말을 하는 요셉을 야단치지 않고 이를 '기억'했다.
그리고 유다의 이야기가 요셉 이야기 중간에 들어온 것이 조금 의아하다. 유다와 요셉의 나이 차이는 7살도 나지 않을텐데, 유다의 노년시절에 며느리와의 에피소드가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들어온다. 즉, 이건 한참 이후에 유다의 이야기가 중간에 껴든 것이다.
이는 창세기 49장 8-10절을 보면 이해가 된다. 야곱은 요셉이 아니라 유다에게 장자의 축복을 준다. 유다는 심지어 장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지파들 중 장자지파의 역할을 하고, 예수님은 유다지파에 속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신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것은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자고 제안한 것도 유다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39장에서부터 50장까지는 일반적으로 '요셉 이야기'라고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창세기 기자의 의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창세기를 그렇게 쓰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도 모른다. 창세기를 쓴 사람이 예수님이 유다지파로 오실 것을 알고 쓸 수는 없지 않나?
요셉 이야기는 사실 '유다 이야기의 일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중요한 시작점은 요셉의 꿈이 아니라 유다가 요셉을 팔자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봐야만 38장이 이해가 된다. 결국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사용하셔서 요셉을 이렇게 인도하셨고 그 뒤에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유다가 어떤 삶을 살았나? 38장에 나오는 유다는 요셉과 극명하게 대조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자녀들을 우선 위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설교들에서는 '유다는 창녀와 잠을 잤다'며 그를 더러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문화를 아직 충분히 공부하지 않은 난 그런 결론은 쉽게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분명한 건 유다는 요셉만큼 온전한 사람은 아니었단 사실이다. 그렇다면 유다의 이야기가 이곳에 들어감으로써 요셉과 대조가 되는 것은 용서하시는 하나님, 선하고 착한 자만 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위로가 되는 것은 왜일까? 한국교회는 과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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