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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혹은 개독/일반적인 신앙에 대하여

내게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란

조금 어려운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아주 개인적이면서 예민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우리 집은 물질적인 영역에서 많이 구속되어 살아온 편이다. 그게 이상하거나 비정상적이지 않다. 부모님은 모두 가정 형편이 여유롭거나 중산층 이상은 됐었다가 가족 구성원의 사업이 망하면서 힘들어지는 것을 경험하셨다. 거기에 부모님은 양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신혼생활을 시작해서 어쨌든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사셨으니 그 과정에서 물질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버지께서 대기업에 다니시고, 월급이 안정적으로 들어올 땐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사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내가 SK텔레콤에 다닐 때부터였다. 나는 주관이 분명한 편이다 보니 원래도 아니다 싶은 지점에 대해서는 의견을 명확히 얘기하고 부모님과도 그로 인해 자주 부딪히는 편이었는데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고 나서는 내게 '너가 이제 돈 좀 번다고 아주 난리구나'라는 말을 어머니께서 하시기 시작했다.

자세하게, 디테일을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시험에 떨어지고, 박사학위를 받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하면서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내가 그로 인해서 경제적인 영역에서 자유로워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내가 가까스로 경제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행복하고 감사한 상태가 되어도 그 말들이 나를 끄집어 내리기를 반복한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사실 힘들었다. 나는 30대에 했던 경험, 그리고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통해서 진짜 기쁨과 행복은 돈에만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정말 필요하면 물질을 부어지실 수 있다는 걸 하루, 하루 광야에서 만나를 받아먹듯이 살면서 경험하고, 느끼고, 믿게 되었는데 부모님께서 그걸 이해하지 못하시고 심지어 '너가 지금 행복한 건 말이 안돼. 너가 지금 행복할 수가 없지'라는 말까지 들으니 너무, 너무 힘들더라. 내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어서, 내 믿음이 그렇게 크고 단단하지 않아서 흔들리더라.

그래서 독립하기로 했다. 부모님께서 서울로 올라오신다길래. 하지만 부모님, 뭐 아버지와는 대화가 거의 없으니 아버지의 생각은 모르겠고 최소한 어머니는 그걸 좋아하지 않으셨고 여러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번에 또 다시 타격을 입고 이번에는 길게 늘어졌던 고무줄이 끊어졌다. 두 분에게 분노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은 없다. 다만, 지금까진 어떻게 좋은 아들, 착한 아들, 두 분을 흐뭇하게 해드리는 아들로 살고 싶고 그렇게 되려는 마음이 항상 있었는데 그게 끊어져 버렸고, 일단 나를 위해서, 내 마음을 보호하는 선택만 하기로 했다.

마음이 편하냐고? 전혀.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뀌나? 내가 결혼을 빨리해서 가정을 빨리 꾸리고 아이를 빨리 갖고 싶은 이유는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이와 두 분을 같이 추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인들을 보면 나도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긴 힘들단 건 알기에 조부모님인 두 분이 내 아이에게 만큼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고, 내 아이가 그걸 경험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내가, 마음이 편할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몇 주간 겪으면서 성경에서 이상한 구절들이 보인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는 마태복음 말씀이다.

이 말씀이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등을 돌리고 싸우고 불화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나를 따르는 선택을 하다보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라는 말씀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나 증오는 갖지 않아야 하는 게 성경적일 것이다. 거기까지는 되는 것 같은데, 그 이상으로 내가 더 큰 사람이 되어서 품고, 안고, 용서하고 가는 건 안된다. 이게 지금 내 상태의 한계다.

하나님이 1순위가 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삶이다. 너무 흔하게 쓰는 표현인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1순위가 아니게 되면, 하나님은 사실 의사결정구조에서 배제되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고? 사람들은 뭘할 때 뭐가 1순위고, 2순위고를 따지는데 조금만 더 현실을 들여다 보면 우린 1순위가 충족 안되면 그 뒤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배우자를 고를 때 연예인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1순위인 사람은 평생 결혼을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은데 그걸 통과 못하면 2순위로 성격을 본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지를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돈이, 내 힘과 노력이, 명예가, 아니 그것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그 사람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에이 하나님 그래도 이것 하나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은 밀려나기 때문에. 율법을 다 지킨다는 유대인에게 "그러면 네 재산을 다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건 그런 의미다. 하나님이 1순위가 아니면 다 소용없다는 얘기.

오바 같고, 비현실적인 것 같은가? 아니다. 정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살고, 결정하지 못하는 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도, 선하시다는 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게 사냐고? 내가 그랬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 난 두 번째 변호사 시험을 보고 나서 변호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험을 계속 본 것은 주위에서 교수님들이 학교로 가려면 라이센스가 있다는 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때 내 마음 속에는 왠지 시험을 보지 않는게 맞는 것 같다고, 순수하게 공부에만 집중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결정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비이성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같은 마음에 순종하지 않은 몇 안되는 결정들이었다.

만약 내가 그때 변호사시험을 애초에 포기하고 안 봤다면 난 어떻게 살았을까? 공부와 논문에 더 집중을 했을 것이고, 박사학위도 더 빨리 받았을 것이며, 그때부터 돈 버는 다른 일들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지금보다 재정적으로도 안정되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난 변호사시험에 떨어진 애가 아니라 보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마음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하나님은 내가 노력을 할 때 일하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내게 1순위가 아니었고, 내게 1순위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해서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덜 상하고 교수가 될 확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미친놈이라고 해도 주시는 마음을 따라 순종해야 했다. 하나님이 정말 1순위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시험에 다 떨어지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놀랍게도 내가 해보려고 하는 것에서 나는 다 떨어졌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연락이 와서 일을 하며 먹고 살았다. 드라마에 투입된 것도, 교수님과 정부일을 하는 것도, 강의를 하게 된 것도 그랬다. 작년에 SK가스 유튜브를 진행한 것도, 대행사에서 일을 한 것도.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길은 내가 만들어, 넌 주어진 것에 최선만 다해'라고 말씀하고, 그걸 증명하시는 것 같은 4년 반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믿는다. 난 주어진 것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고, 길과 방향은 하나님이 내실 것이라고. 사실 나의 그런 믿음 없음이 변호사시험에 떨어질 때 내게 가장 큰 고통을 줬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합격시킬 수 있을텐데 이건 뭔가 싶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혼을 못하고 싱글로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 뜻이라는 건 아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우리가 차 버리고, 나의 생각과 계산을 앞세우는 선택과 우리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에 순종하는 선택이 혼재되어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무엇이 우리가 잘못 선택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지난 몇 달간 이제는 정말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는 걸 포기해야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면서 문득,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간과 고비마다 사람을 붙여주셨는데 그 사람을 내가 세상적인 계산과 이유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께 사람을 왜 안 보내주느냐고 징징댔는데, 알고보니 하나님은 내게 사람을 보내주신 것을 내가 못 알아본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이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건 우리의 생각이 앞설 때 이런 일들이, 나의 경제활동과 박사학위가 미뤄지고 결혼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은 완벽하게 전지전능하시고 선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분이 이끌어가시는대로 기꺼이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사실 우리를 위해 장기적으로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인간은 이성을 개입시켜서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고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망친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내 안에 드는 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라는.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말씀을 붙들고 최대한 기도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내가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 머리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는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마음이 들 때 평안함이 찾아온다면 그건 보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더라. 여기에서 전제는 항상 말씀과 기도를 쉬지 않는단 것이다. 평소에 말씀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면서, 즉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한 노력은 하나도 안하면서 마음이 그냥 그랬다고 하면 그건 사이비일 확률이 높다.

이해되지 않아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아도 그런 선택을 하면 그때부터 삶이 재미있어지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기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런 선택들을 하면서 '야 이거 재미있는데'란 생각이 들고 하늘에 나는 새와 땅에 나는 풀도 키우시는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실 것이라는 것을 진짜로 믿을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나의 합리성과 이성으로 인해 맛보지 못한 행복,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이게 번지점핑과 스카이다이빙 하는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희열과 기쁨과 비슷할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스카이다이빙 할 때는 낙하산과 내 뒤에서 나를 이끄는 사람을 신뢰해야 그 느낌을 맛 볼 수 있듯이, 번지점핑 할 때는 내 발을 붙드는 그 줄을 신뢰해야 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듯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리스크를 하고 온몸을 던져야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걸 경험하면서 그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희열과 평안함과 안정감은 세상이 주는 그 무엇보다 대단하고 크더라. 그걸 몇 번 제대로 맛보고 나면 중독되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만큼.

물론 그걸 알게 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바울이 우리에게 자신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한단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갈아가며 세상의 합리성과 이성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면서 하나님을 한정 짓는 습관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선택들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잘못 분별한 거면 어쩌냐고? 그런 건 또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건져서 구해주신다. 전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들을 많이 봤다고? 그런 경우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포장해서 파는 사람들이다. 말씀도 안 읽고, 기도도 안하면서 샤머니즘 처럼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말이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실수하지 않으신다. 그걸 믿는 것. 정말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 절대로 그 분보다 내가 앞서지 않고 그 분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출 각오로 매일, 순간순간을 사는 것. 일상의 모든 것을 항상 말씀을 읽고, 묻고, 듣고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과 수다를 떨고 살면서 결정하는 것. 그게 진짜 기독교인으로 사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게 가장 맞는, 맞춤형으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게 진짜 기독교인의 마음가짐과 삶의 모습이다.

내가 욕구와 욕망이 끌리고 머리로 상대와 결혼을 하고 싶어도 고민하고 기도하면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으면 기꺼이 포기하는 것, 내가 변호사 시험을 보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는 듯하면 기꺼이 포기하는 것, 다들 가야 하는 너무 좋은 조건의 회사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다면 기꺼이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데는 다 이유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알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 만약 지금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내가 계산하고 내 생각으로 판단한 것이라면 그 역시도 하나님께서 돌이키시고 그 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결국엔 내게 가장 좋은 상황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 내겐 그게 진짜 기독교인의 삶이다.

이건 '신학'적인 관점들도 일부 반영되어 있지만, 내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신앙' 고백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은 성경에서 확인이 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할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삶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누구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도 않겠지만,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2순위, 3순위로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 수 있게 나를 보호하는게 내겐 1순위고, 그 과정에서 내가 본인들이 원하는대로 결정하거나 움직이지 않음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걸 보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겠지만 거기에도 다 이유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믿고, 나는 기꺼이 그 선택을 하겠다. 아니,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게 하나님이 1순위인 삶이라고 생각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