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킨스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여러 근거 혹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과정에서 [구약의 신은 모든 픽션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시기가 심하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옹졸하고 불공평하며 용서를 모르고 집착적인 통제광에 보복적이고 피비린내나는 인종청소를 자행한다. 여성혐오자이고 동성애혐오자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영어살해자이며 대량학살자이고 자식살해자이며 역병을 일크기고 과대망상자이며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자이며 변덕스럽고 고약하게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고 주장한다.
그가 지적하는 부분들은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맞는 말이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해야 하는 질문은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는데 있다. 당시에는 성경도 없었고, 여러 종교들의 종교적 행위가 폭력적이었다. 피라미드에 산 사람을 묻는 것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던 시대다. 우린 그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당시의 문화와 환경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있으셨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빼내기 위해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시면서까지 엄청난 일들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서 자신들의 삶을 망각하고 자신들을 그 땅에서 끌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모세가 산에 올라가 얼마간 내려온지 않는다는 이유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그들이 자신을 믿게 만드실 수 있었을까? 이집트의 장자들이 다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신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자유의지는 여전히 보장해 주면서도?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 있는 내용이 당시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어찌보면 수십, 수백, 수천년 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잔혹하게 다루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입증하시기 위한 일들을 압축해서 정리한 책이다. 그 일들이 수 천, 어쩌면 수 만년에 거쳐서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성경[만] 읽으면서 느끼는 잔혹성은 실제 잔혹성의 수준보다 더 심할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이 아닌 지식으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구약은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보내주시기까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오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우리는 지금의 관점과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그런 맥락에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같은 시대를 사는 북한 사람들이 정권의 강압을 받아들이고 그 영향 하에 사는게 이해가 되나?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을 수천, 수만년 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지하고, 그를 따랐을지는 사실 우린 알 수가 없다.
인류역사상 인권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처럼 발달한 시기가 있었나? 없었다. 유럽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은 아이들을 굴뚝 청소나 탄광에 밀어넣지 못하게 한지가 200년도 안됐다. 그 시기의 사람들에게 오늘날 인권의식을 기준으로 설득하려하면 그들이 그걸 받아들일까? 아니, 축구공을 만드는 공장에서 아이들이 공을 바느질을 하도록 한 건 21세기에도 계속된 일이었다!!
인간은 여전히 착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후에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설득하고 인간이 하나님이 하나님됨을 알도록 만들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믿어주신 분이 아닌가?
여기까지의 글은 모두 이성으로, 머리로 한 생각들이다. 구약을 읽으면 나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싶은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 디테일들을 보다보면 하나님은 당시에는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라고 평가하고 내쳤을 사람들도 품어주도록 하셨다. 그 대표적인 예가 레위기 13장에 나와있는 전염병에 대한 얘기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기 즈음에는 피부병이 전염되면 그 사람을 버리는 문화가 있었을텐데 (그때만 그랬나... 우리나라도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에 모으면서 그 사람들을 짐승 같은 존재로 보는 시선이 있지 않았나... 여전히 존재하고) 하나님은 그들 중에 증상이 괜찮아진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다시 받아들이도록 하셨다.
큰 틀만, 자극적인 것만 보면 하나님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과 디테일들을 보면 구약에 나온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선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왜?]를 물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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