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는 연애
연애에서 개인적으로 밀당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는 밀당을 할 줄을 모른다. 소개팅을 통해 만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것을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한 달 이상은 연락하고 알아가자고 생각했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 사람 집 앞으로 찾아가는 성향인지라 밀당을 하거나 연애에 있어서 계산을 잘 하는 편은 아니다. 연인관계가 아닌 사람에게도 호감이 있으면 챙겨주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성향이고 말이다.
그래서 사실 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두 사람이 연애하면서 지출한 항목을 모두 엑셀로 정리해서 메일로 받았다는 얘기에 굉장히 놀랐었다. '주차비, 밥값, 기름값, 벌금 내역까지 엑셀로 작성을 해서 누가 얼마를 냈고 그에 따라 너는 얼마를 내 통장으로 입금해라!'라는 요지의 메일을 보내는 사람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역시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더라.
그런 계산을 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모두 다른 생각을 갖고 사는 다른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왜 그런 비용들을 엑셀에 기록하고 있었을까? 원래 가계부를 쓰듯이 꼼꼼한 성격이었고 이별을 하자 여러 생각이 들어서 그 내역들을 뽑아냈다고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언젠가 이별할 상황을 대비해서 작성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또 다른 차원의 계산
하지만 이런 종류의 계산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계산은 한다. 연애에 있어서 말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그 계산은 심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는 게 너무 많아지고, 누군가를 만나는 기회비용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학부 때는 사실 연애를 한다는 것은 CC인 경우 학교에서 일상을 같이 하는 것이고, CC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험기간이 아니라면 최소한 주말에 시간을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데이트가 아니면 할 게 없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그래서 사실 학부 때 연애를 하는 기회비용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러나 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면 모든 게 달라진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시간을 쪼개서 공부를 해도 부족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이제 나이는 들어서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는 민망한데 수입은 많지 않기에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을 한다고 뭔가 넉넉해지는 것은 아니다. 승진도 해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하는데 월급은 뻔하고, 금전적인 상황은 학부생 때보다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퇴근 후 또는 토요일 오전에는 조금 쉬고 싶고 일요일 저녁에는 다음날 회사에 나가야 하기에 무리하고 싶지 않은 건 모든 회사원들의 마음 아닌가?
이렇듯 학부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는 물리적으로 돈과 시간이라는 자원의 제약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하거나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많아지기에 나이가 들수록 연애는 힘들고 계산을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가 우리는 어린, 혹은 젊은 시절에 마음을 다해 연애하던 방법을 잊어버리고 반사적으로 머리 속에서 계산을 하면서 손익을 계산하는 게 습관이 된다. 그리고 '이제 그때의 설레임은 느낄 수 없는 걸까?'라고 한숨을 쉰다.
설레일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제 그런 감정은 느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런 설레임을 느끼는 일들이 있었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 마음이 설레이는 방법을 잊은 게 아니라 나의 계산하는 습성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커졌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수영, 스키, 보드를 하거나 타더라도 몇 번 연습을 하고 나면 예전에 할 줄 알았던 것들이 되돌아오듯이, 연애감정도 내가 기꺼이 마음을 열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계산하고 따지는 많은 것들은 사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하지도, 그 영향이 크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럴 때 연애를 하면 이런 것에 방해가 될 것 같고, 저럴 때 연애를 하면 이걸 못할 것 같지만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그 시간을 꼭 더 생산적으로 쓰는 건 아니더라. 그리고 어떤 연애를 하느냐에 따라서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내가 내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더라.
그 이후에 나는 소소한 건들에 대해서 계산을 더 이상 하지 않고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기울이기로 했다. 다만 내가 꼭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들은 세워둔 상태로 말이다. 최소한의 원칙만 남겨둔 상태로. 그러자 이제는 상대가 계산기를 두드리다 나를 밀어내는 일은 생겨도 내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턴가는 30대 중반이 되었어도 아직 설레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계산을 전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계산인지, 아니면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만약 일거수일투족을 계산기를 두드리듯 따지듯이 계산하는 게 습관이 되어간다면, 그러한 습관은 우리의 감정 위에 많은 짐을 쌓아둘 수 있고, 짐이 오랫동안 쌓아둘수록 감정으로 가는 길은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설레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50-60대에도 설레이는 감정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때 재혼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은가? 그러면 그분들의 사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만큼 오랫동안 '계산해왔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기가 힘들어진 것이며, 그렇게 나 자신을 방치할수록 그런 현상은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계산하는 습관'이 없어질 때야 비로소 우리는 감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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