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연애와 관련해서 너무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연애세포' 그런데 과연 그런 게 존재할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믿어지는 대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에 대해서 답을 제시할 뿐이다. 사실 연애세포에 대한 논의의 가장 큰 맹점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연애세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그 개념을 자신들 멋대로 쓴다는데 있다. 그래서 연애세포가 죽었다는 표현도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다.
연애세포가 죽었다는 표현이 가장 많이 쓰이는 경우 중에 하나는 '이제는 누구를 봐도 설레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든지 처음으로 설레일 때가 있지 않았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이다. 그때 우리는 연애세포가 생성되어서 그런 설레임을 느꼈을까? 아니다. 이성에게 설레임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작용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느 순간 이성을 만나도 설레이지 않을까?
첫 번째 가능성은 그 사람이 너무 바쁘기 때문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너무 바쁘다 보면 다른 것에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지 않나? 그러다 보면 우리는 몸과 마음이 지쳐서 뭔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쓸 에너지가 없게 되고, 우리 몸과 마음은 일단 쉬는데 초점을 맞추고 말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경로 자체가 확 줄어들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이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듯한데 이는 일단 나이가 들수록 주위에 이성이 줄어들고, 그중에서도 매력이 있으면서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는 이성들은 빨리 결혼하는 영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대화는 통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는 통하지만 외적으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주위에 남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 가능성은 본인이 자신의 본능에 따라서 연애를 정말 엄청 많이 해서 '할 건 다 해봐서' 더 강한 자극이 아닌 이상 이성적으로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MSG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일정기간 이상 먹으면 자연 그대로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래서 사실 '설레임'적인 측면에서 연애세포를 접근한다면 그건 본인이 설레임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한 게 아니라 자신의 외부 또는 내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됐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맥락에서 연애세포가 죽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설레임은 느끼는데 과거와 달리 이성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미로 '연애세포가 죽었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사실 이에 대해서는 설명할게 별로 없는 이유는... 그런 면에서는 연애세포가 죽은 것이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엄연히 말하면 '연애세포'가 죽었다기보다는 '이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인지를 머리와 몸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연애세포는 분명히 죽는다. 운동을 꾸준히 하다가 몇 주 또는 몇 달이라도 쉬면 몸이 예전에 운동을 하던 강도를 잊어버리듯이, 오랫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고시공부를 하던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수다 떠는 것을 어색해하듯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제2외국어를 쓰려고 하면 단어가 얼핏 떠올라도 문장은 잘 만들어지지 않듯이 연애를 오래 하지 않으면 이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맥락에서 애초에 연애세포가 생성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본인은 설레이기는 하는데 이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연애세포 자체가 형성 되지를 않은 걸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라나는 환경에서 이성을 접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경우가 많다. 부모님께서 보수적이어서 이성과 놀이터에 있는 것도 막으시거나, 이성친구들이랑 무리 지어 다니기만 해도 혼내는 분들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중 남고 또는 여중 여고를 나온 분들 중에는 이성과 접점 자체가 없어서 이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는 분들을 종종 봤다.
굳이 따지자면, 그런 경우들에는 연애세포가 죽은 것이 맞다. 하지만 연애세포가 죽은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건 연애세포가 죽었다는 것은 '이성을 대하는 노하우'를 몸이 잊어버렸거나 그런 것을 애초에 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 이 '노하우'라는 것이 우리 마음의 작용을 방해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굳이 소개팅을 부탁하지 않아도 소개팅이 밀려들던 시절에 난 어느 순간 그래서 소개팅을 끊었었다. 소개팅을 많이 하다 보니 소개팅에 나가서 상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싫어하지 않게 대할 수는 있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주선자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항상 기계적으로 '욕을 먹지는 않을' 정도로 첫 만남,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기계적인 반응이 나의 마음을 가두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싫어서 난 꽤나 오랫동안 소개팅 자체를 다 거절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연애세포가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연애세포의 작용은 결국 '기술' 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 그 기술과 습관이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줄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런 기술과 습관이 '먹히는'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뭔가를 누르면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말이 자동적으로 나올 정도로 연애세포가 살아있던 시절에 나와 만나는 친구에게 나는 '너는 멘트 준비해서 다니니? 어떻게 그렇게 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나와?'라며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못생기지도 않은 애가 그런 멘트를 하는 게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고, 잘 생기지 않은 데다가 기본적인 인상은 보수적이어서 여자들이 긴장을 풀기에 딱 좋은 캐릭터라 하나님을 몰랐다면 제비가 됐을 것이라는 뭔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설명과 함께 말이다.
그렇다. 연애에서 능수능란한 면이 있는 건 분명 장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특히 연애 초반에는 말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남녀관계에서 핵심은 연애세포의 작용으로 인한 기술과 노하우가 아니다. 핵심은 마음이고, 마음에서 나오는 순수함이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연애세포의 작용이 그 마음의 순수함이 전달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연애세포가 죽은 것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호감이 생긴 사람에게 전달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싱글로 지낸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 인간은 누구나 연애세포가 새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성을 이해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가 오랜 싱글 기간으로 인해 그걸 잊은 것 같아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연애세포는 생성되게 되어 있고, 과거에 연애세포가 있었다면 그 세포는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으니까. 일종의, 연애세포의 부활이라고나 할까? 운동을 오랫동안 안 했어도 근육이 만들어진 틀이 몸에 남아있기 때문에 몸을 한번 만들었던 사람은 몸을 다시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가벼운 만남, 스쳐가는 인연, 지금 당장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만남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그 능수능란함이 있는 게 확실히 유리하다. 하지만 당신이 하려는 연애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맞는 인연이 나타났을 때 적절한 연애세포가 생성될 것이고, 그것이 어설프게 생성되더라도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건 상대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 어색함과 투박함 덕분에 말이다. 그러니 연애세포가 죽거나 살거나 그대로 두자. 어차피 될 인연이라면 서로 알아보게 되어 있으니까.
사랑은, 연애는 기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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