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면 들어주신다?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듣기 가장 불편한 얘기 중 하나가 '이렇게 기도하니 이렇게 들어주셨다'는 말이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이 한 술을 더 떠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니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뉘앙스에 따라서 그 말이 불편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이 많은 경우 불편한 이유는 기도를 정말로 간절히 대로 그 기도가 현실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그렇다면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란 말인가?
장담하건대 내 지난 몇 년을 본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는 그렇지 않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정말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교회에서 일들을 섬기면서 살았지만 내가 원했던 대로 내 인생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하나님을 덜 찾을 때(?) 사회적인 기준으로는 내가 더 잘 나갔던 것 같다. 가장 성경을 읽지 않을 때 돈도 제일 잘 벌었고, 생활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런 인생들이 나 하나가 아닌 것을 보면 기도를 열심히 해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해서 뭔가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성경에만 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그토록 간절히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 앞에서 치우시고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나?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충분히 경건하게 살지 않으시고 기도를 하지 않아셔서 그랬단 말인가...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다른 종교에서 기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기독교에서 기도는 절대자, 혹은 신과 나의 대화다. 대화는 그 주체가 되는 자들이 말을 하기도 하지만, 듣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그에 따라 기도는 내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하시고 싶은 마음을 듣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하고 싶으신 마음을 듣는다'는 것이 잘못하면 신비주의적으로 갈 수 있는데, 이는 물리적으로 음성이 귀에 들리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은 보통 기도를 하고 물을 때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의미하고, 사실 그때 드는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지는 성경 말씀에 비춰서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내 욕심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인지 여부를 분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 경우에는 평안함이 동반된다는 특징도 있지만 어쨌든 그 첫 번째 검증 방법은 성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와 성경 말씀을 읽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 더 기독교에서 전제하고 있는 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사용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는 '기독교적 가치'에 대해서 더 알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도 없이 물음을 던지고, 성경을 더 읽고, 목회자들에게 모르겠는 것을 물어봐야 함도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기독교에서 기도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묻고, 그 답을 들어가며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행위이지 정화수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하는 것과 같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
이쯤 되면 누군가는 그렇다면 우리가 왜 기도를 해야 하며, 왜 하나님은 어떤 기도는 들어주시고 어떤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아는가?'에 대한 것이다. 과연 나라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을 하면서 살 때 평생 가장 행복할 수 있을지, 어떤 것이 나에게 어떤 만족감을 줄지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서 본다면 나는 3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는 지금에서야 나를 조금 알듯 말듯하다. 그리고 50이 넘어서도 본인을 모르시는 분들을 수두룩하게 봐왔다. 인간은 본인 자신을 잘 모른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지금 당장 좋아 보이고 구하는 것들, 달라고 하는 것들이 나를 위해서 정말 필요하고 좋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건 시간이 지나 봐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때로는 우리가 달라고 조르는 것을 주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른단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초콜릿 맛이 나는 독이 있다고 하자. 5살인 아이가 그 독이 초콜릿인 줄 알고 달라고 한다면 그걸 줄 어른이 있을까... 만약 지금 우리에게 20억이 주어지면 우리는 모두 엄청나게 행복해질까? 좋은 집과 차를 사겠지만 그 이후에 그걸 관리하는데 드는 노력과 비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목돈이 갑작스럽게 주어지면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는데 돈을 쓰면서 거기에 익숙해지게 되어있는데 그 20억을 몇 년 안에 다 쓰고 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 혹시라도 그 돈을 종잣돈 삼아 돈을 불리기 위해 도박을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20억 정도라면 평생에 거쳐서 규칙적으로 아껴서 살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20억이 주어지지 않은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
그리고 사실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그대로 다 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만약 대학입시 때 기도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들어준다면 아마 서울대 정원이 몇만 명, 아니 십만 명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들이 굳이 서울대에 가야 할 이유는 또 있을까? 사실 본인은 공부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머리를 잘라주는 것이 더 재미있고, 거기에서 더 보람을 느낀다면?
즉, 우리가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을 때는 (전지전능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전제하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걸 들어주시지 않으신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그리고 그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 기도가 들어졌다면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게 내게 필요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묻고, 답하며 고민하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진정한 대화가 오가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분명히 그랬다. 그래서 기도는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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