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에서 가장 대조되는 것은 다윗과 사울이다. 사람들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것을 대단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 상황에서는 그의 믿음을 봐야 한다. 누가 봐도 그가 골리앗과 싸웠을 때 이길 수 없었다. 누가봐도 그는 목숨을 걸고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바보 같을 정도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간다. 그에게는 다른 기준이 없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했고, 하나님만 바라봤으며 자신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을 신뢰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작정 하나님만 믿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방법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신에게 쌓인 경험을 근거로 주장한다. 양을 쳤던 경험이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는 점, 본인은 갑옷이 익숙하지 않아서 입는 것이 오히려 불리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자신에게 적절한 무기를 갖고 전장으로 나간다. 그가 무조건 하나님, 하나님만 한 것도 아니다. 자기 분석을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경험을 최대한으로 살렸다.
이는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사람들은 현실을 얘기한다. 하나님도 본인이 노력하는 자만 도우신다며 노력만을 강조한다. 반대로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조건 앉아서 기도만 하고 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모두 잘못된 선택과 결정이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균형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고, 정말 가야 할 길이라고 보이면 현실의 장벽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그런데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 중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본인에게 어떤 경험을 주셨는지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쓰시려면 쓰실 수 있는 무엇인가를 주지 않으셨겠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명과 비전은 이러한 문제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잡아서 이뤄져야 한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셨고 그에 따라 이 땅에서 내 소명은 무엇일지 고민을 하고 있나? 아니면 내가 가고 싶은 고지를 찍어놓고 저 산지를 내게 달라고 징징대고 있나?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내 뜻과 의지를 이 땅에서 펼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스스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어야 한다. 자발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그건 고통스러운 희생이라고? 아마 아닐것이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방법으로 사용하려 하신다면 그에 맞게 DNA를 심어 놓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아는가? 10년 전과 지금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성향은 얼마나 똑같나? 변하지 않았나?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울은 그런 성향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세운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을 추구하려는 모습. 그건 어쩌면 단순히 다윗을 이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이기려는 시도. 그게 사울이 한 시도였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자신의 방법으로 그것을 통제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
사울이 만약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윗을 좋은 리더로 잘 양육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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