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름이 틀림이었을 때
31살 때 일이었다. 당시에 만나던 친구와 만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화이트데이가 코앞이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는데 '이 나이에 무슨 화이트데이 같은걸 챙기냐'면서 대학원 생활도 바쁠 텐데 챙길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 그래도 챙기고 싶긴 한데, 학교 근처에는 마땅히 백화점도 없었고 학교 후문 쪽에 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학원 생활이 너무 팍팍하던 시기여서 어디 멀리 나갈 엄두가 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사탕이랑 초콜릿으로 아름아름, 그냥 귀엽게 만들어서 그 친구에게 줄 것을 직접 만들었다. 화이트데이에 큰 의미도 두지 않는 친구니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데이트를 하면서 '귀여우라고' 그걸 내놓은 순간, 그 친구는 어처구니가 없어하면서 그냥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당했고, 당황했다. 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냥 백화점에 가서 나온 기성품 초콜릿 하나 사 오면 되는데 그것도 못하냐'며 이 나이에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하더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미안한 마음에 다음에 만날 때 꽃다발을 사들고 갔고, 그때서야 그 친구 기분이 좀 풀리더라.
뭐가 잘못됐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한 것 중에 틀린 건 뭘까? 그 친구가 화를 낸 건? 그 이후에 그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방식과 시기 등에 화가 났고, 그 친구를 좋아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 친구가 틀리고, 잘못되고, 자기중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면 그 친구도 나도 틀리거나 잘못된 게 아니라 우리가 참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가 맞지 않았던 건 둘 중 누군가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더라.
그걸 깨닫기까지는 그 친구의 배경과 나의 배경을 살펴봤다. 그 친구는 서울에서 상당한 수준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계속해서 살았고, 집안에서 귀하고 곱게 자란 친구였고 비슷한 동네에서 경제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직장인들을 만나왔다. 20대 후반이면 보통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아버지를 둔,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을 다니는 상황에서는 통장 잔고를 수시로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당시에 그 친구와 내가 있었던 상황과 환경의 차이는 하물며 화이트데이를 접근하는 방법에서도 차이를 야기했다. 역시나 말로는 챙기지 않아도 된다던 화이트데이는 챙겨야 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입장에선 챙기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 챙기는 것의 기본적인 눈높이는 그 나이와 기준에 맞는 것에 있었다. 사실 그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지금의 나였어도 아마 그렇게 간단하게 화이트데이 선물을 해결했을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옹기종기 직접 만들어 온 게 조잡스러워 보이는 게 자연스럽다. 반면에 내 입장에선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고, 끼니도 돈을 생각하면서 챙기던 시절에 그 친구가 기대했던 선물을 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1년 여가 지나서 우연히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 친구가 울먹이면서 '돌아보면 오빠는 참 착하게 해 준 것밖에 없었는데, 오빠 가슴에 못 박아서 내가 죄를 받나 봐.'라면서 나와 헤어지고 나서 만난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서 털어놓더라. 그 친구는 그때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우리는 누군가가 틀려서가 아니라 달라서 헤어지게 됐다는 것을 말이다.
연인들이 다투는 이유
연인들은 다툴 수밖에 없다. 그건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역설적으로 더 가깝기 때문에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연인들은 '네가 잘못한 것'이라며 상대는 틀리고, 본인은 맞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디테일들을 살펴보면, 누군가가 완전히 틀렸거나 잘못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데이트를 마치고 반드시 집까지 바래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건 부담스러우니 적당히 헤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들은 기념일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매일 통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연락은 간간히만 하다가 일주일에 하루 정도를 오전부터 저녁까지 같이 보내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틀렸다' 라던지 '당신이 잘못했다'라고 주장하며 상대를 코너에 몰면서, 혹은 서로를 코너에 몰면서 싸우는 것은 그 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가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방식이 상시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야 비로소 그렇게 상대가 틀렸고 잘못했다고 밀어붙일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만약 연인 간에 다툼이 그러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면, 난 개인적으로 그 사람과는 헤어지는 것이 본인의 시간, 에너지와 돈을 아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상대가 그 관계에서 모든 것을 본인의 방식대로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방식과 상대의 방식이 차이가 나기 때문인데,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면 두 사람은 언젠가는 결국 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인 간의 다툼이 모두 다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연인 간에도 분명히 틀린, 혹은 잘못하는 것은 있다. 그 첫 번째는 상대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고 '모든 것'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려는 태도다. 이는 연인은 평등한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인 바, 두 사람이 서로 맞추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은 전혀, 혹은 거의 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상대의 가족이나 상대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언행을 한 경우 또는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 경우다. 이처럼 말로 하는 실수는, 그 말을 한 당사자가 무조건 잘못한 것이고 틀린 것인데 이는 그러한 언행이나 폭력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약속을 어기는 경우다. 이는 연애 혹은 연인관계는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데 두 사람 간의 관계에서 약속을 반복적으로 어기는 것은 그 신뢰를 허무는 일이고, 상대를 존중한다면 약속을 그렇게 어길 수가 없기 문이다.
사실 연인관계에서 '틀림'은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고, 대부분의 다툼은 사실 두 사람 간의 다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연인 간의 다툼 혹은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은 모두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짧아도 10여 년, 길면 30년 넘게 같이 산 부모와 자식도 다른데 어떻게 만나기 전까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 간에 의견의 불일치가 없을 수 있겠나? 그렇다면 연인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숙제는 그 다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있고, 그 핵심은 역시나 '대화'일 수밖에 없다. 서툴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그 이유를 설명하고, 상대의 그것을 들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해 가고 맞출 수 있는 영역들을 찾는 한편 두 사람의 다름을 존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만약 맞추려고 노력해도 맞춰지지 않고, 상대의 다름이 계속 일정 수준 이상으로 거슬리고 그로 인해 계속 부딪힌다면? 서로가 인연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고, 서로가 자신을 더 알아가는 기회로 삼고 이별을 하는 것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그렇게 헤어질 줄 알아야 비로소 헤어지지 않을 사람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다름과 상대의 다름의 관계에서 존중하거나 맞출 수 있는 마지노선이 있기 때문에. 물론 이런 조언은, 서로가 최선을 다해서 맞추기 위한 노력을 해보고 난 후의 이야기다.
나이 든 사람들의 연애기간이 짧아지고, 연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 대부분의 경우 연애를 통해서 자신이 맞출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아니다 싶으면 그 지점을 놓고 싸우고 상대를 맞추려 하기보다는 이별을 택하고, 그 주요 지점에서 감당 못할 차이가 없다면 다른 부분은 맞출 자신이 있으니 결혼을 결심한다. 난 분명히 글을 연인 간의 다툼, 다름과 틀림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글의 마무리가 나이 든 사람들의 연애로 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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