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조금 넘게 몸이 계속 안 좋아서 아침에 책상 앞에 앉지 못하고, 해야 할 일들은 쌓여서 가까스로 그 일들을 쳐내는 수준으로 일을 했다. 지난 주말엔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반나절 이상은 자면서 보낸 듯하다. 그랬더니 몸이 이제서야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그렇게 지내면서 말씀을 읽지 못했고, 교회 통독표 진도는 따라잡아야겠단 생각에 밀린 시편을 한번에 읽었다. 시편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시편을 읽어보니 은혜가 넘치고, 다윗의 감정적 변화가 느껴진다. 예전에 내가 읽었던 시편은 단순히 다윗의 믿음 고백이나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는 글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긴 호흡으로 읽어보니 그의 마음이 더 깊게 느껴지고 그가 왜 이렇게 고백했는지가 느껴졌다.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는 시를 쓴 것은 기쁨과 환희에 넘쳐서 그랬을 때도 있지만 적지 않은 경우 자신이 힘든 상황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다윗이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그를 높이지만, 길게 한 호흡으로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버팀]이었다. 그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할 때 그가 하나님을 높이는 시를 쓴 것은 그의 마음은 무너지고 원망으로 가득 차려고 하지만 그는 경험적으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그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렇게 울부짖으며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물론, 그가 대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시편들도 있다. 그런 시편들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다. 다윗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했고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도 이렇게 울부짖고 힘들어 한다면 내가 힘들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미쁘게 여기시고 용서해주시겠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시편을 길게 읽다보니 그가 그렇게 울부짖고 살려달라고, 원수들을 무너뜨려 달라고 하는 시를 쓸 때보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쓸 때 그의 고통이 더 크고 깊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찬양하는 시를 쓰면서 온 몸으로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과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 자신을 탓하면서 '내가 왜 이러지'라고 부정적으로 가기보다 그는 이성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부르짖고 찾으면서 '하나님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합니다. 하나님 나를 좀 붙들어주세요. 내가 힘든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을 부인하려 하는 내 마음으로 인해 내가 더 힘듭니다. 하나님 내 마음을 붙들어 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많이 읽으면 하나님을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망가지는 목회자들이 왜 생기겠나? 그들은 매일 같이 자신들 나름대로 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을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이 마음과 감정의 상태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 듯한데, 우리의 마음과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뀌나? 그 기준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먼저였다가 하나님이 먼저이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게 과연 신앙의 전부일까?
다윗의 신앙은, 다윗의 시편들은 신앙은 내 자신과 싸우는 것임을 보여준다. 내 안에 일어나는 마음들을 놓고 다윗은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그가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약하고 악한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탓하기보다 그 시간에 이성과 의지로 하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을 높인다.
그의 믿음은 그냥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물론,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시편을 쓴 시기는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어느 정도 경험한 이후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이성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지적으로 서 있다. 그는 그렇게 버틴 것이다.
그가 시를 써야 했던 것은 아마도 그가 그 힘든 마음을 더 굳건하게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 기도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믿음이,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버텨지지 않는 것을 느꼈기에 그는 시를 한자, 한자 쓰면서, 글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쓰면서 버텼을 것이다. 그가 곳곳에서 자신 있게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계속 나갑니다. 내 신앙은 이렇게 확고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을 엄청 원망하고 1주일 정도는 무신론자로 살았었다. 그 무신론이 무너진 것은 나의 기도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기도도 안되고, 말씀도 안 들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더라. 그 순간 뭔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이 없는데 내가 지금 이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건가 싶었다.
그 이후부터 내 삶은 항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때는 이유가 있을거야, 내 앞 길을 막으실 때는 그게 나를 위한 최선이 아니기 때문일거야라고 믿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내가 가진 옵션들을 조합해서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을 찾아가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도 그렇다. 가정에 대한 소망함이 너무나도 크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을 내가 놓친 연인도 있음을 알지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이렇게 두신 것은 그 또한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의지적으로 믿고 기다린다. 경제적인 상황이 불안정하지만 지금까지 날 굶긴적 없으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듯이 항상 내 생계는 해결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길을 여실 것을 기다린다. 그 과정에서 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수십번도 더 흔들리지만 그때마다 나는 의지적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믿고 기다리겠다고.
우리는 과연 그렇게 버티고 있나?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흔들리고 요동치며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떠나지는 않나?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상당수, 아니 대부분이 그렇게 산다. 그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앙이 아니다. 시편을 긴 호흡으로 읽으면서 그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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