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애할 때 상대에 대한 조건을 따지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무의식 중에 따지는 게 굉장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보다는 본인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낫지 않나? 이는 '난 이러이러한 조건은 가진 사람과 만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러이러하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겠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는 또한 '난 이 정도의 요건을 갖춘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인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건 좋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조건이 단기적으로는 행복을 줄 수도 있지만 장기적인 행복을 담보하진 못한다는데 있다. 그러한 조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하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조건이 실제로 그 조건이 아닐 수도 있으며, 그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해서 다 본인이 생각하는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학력이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더 똑똑한 것도 아니며, 인성이 갖춰진 것도 아니고, 지금 돈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20년 후에도 그 사람이 그 정도의 수입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억대 연봉을 받던 사람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재산을 다 날릴 수도 있고, 갑자기 종교인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외모적으로도 어렸을 때 이뻐보이고 잘생긴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서 '인상'이 변하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이쁘거나 잘생기지 않았던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인상이 좋아지면서 아름다워지고 멋있어지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얼굴이 갑자기 늙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애라면 모르겠지만, 만약 결혼까지 생각을 한다면 사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잠시 힘들어지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내 삶이 행복하겠단 생각이 드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이는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며,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또 사람들의 조건을 따져보지만 확률은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상대방의 조건을 따지기보다는 내가 상대에게 기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된 상황이라면 난 상대방의 조건을 더 따지기보다는 상대방과 있을 때 나의 모습에 더 집중해서 살펴보는 편이다.
그러한 모습들 중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과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끌어내 지는지, 즉 그 사람과 있을 때 나의 모습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인간은 다차원적인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지 않나? 그리고 그 모습들 중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도 있지만 내가 싫어하는 모습도 있지 않나? 그리고 내가 A라는 사람과 있을 때와 B라는 사람과 있을 때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 않나?
우리가 그렇게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그러한 면으로 화학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건 상대방이 내 안에서 그런 내 모습을 끌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만났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작용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질 수 있지만, 상대방으로 인해 끌어내어지는 나의 모습은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나의 다른 모습들이 끌어내졌고, 그 패턴은 그 사람과 만나는 이상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되더라. 그게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상대방과 있으면 내가 계속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지고, 내가 싫어하는 내 말투가 나오고,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과 연애기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지 않겠나? 연애를 하는 것은, 가정을 꾸리는 것은 더 행복하기 위한 것인데 내 안에 그런 작용을 일으키는 사람과 내가 굳이 만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상대방과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오게 된다면,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과 함께 할수록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더 강화되고 그에 따라 내가 내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내 모습을 계속해서 끌어내주는 상대방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난 O형들이 대부분 그렇듯 어색한 것은 참지 못하기 때문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것 같으면 활발하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나대고 밝아지지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모습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 에너지가 다 소진되기에. 난 사실 그냥 조용하게 두 사람이 각자 할 것을 하고 있어도 같이 있음으로 인해서 편안해지는 관계, 내가 억지로 뭔가를 하지 않아도 편안함이 느껴지는 상태를 가장 좋아한다. 내가 말을 못 하는 것도, 평균적으로 안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나를 그런 모드로 만들어 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기에 난 소개팅을 하거나, 썸을 탈 때 상대와 있을 때 내가 어떤 모드가 되는지에 대해서 나 자신을 관찰하는 편이다.
위에서 내가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한 것은, 상대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함의하는 것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힘든 점,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말하는 게 싫어서 상대방을 주로 듣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엄연히 말해서 자신이 듣는 것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말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가 말을 할 때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이 하는 말이 거슬림 없이 편하게 들려지고 이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방의 말이 들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각,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환경 등이 종합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상대방의 말을 그렇게 듣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그게 결국 대화가 잘 통해야 한다는 거 아니야?'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말을 해버리고 대화가 통했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과 내가 정말 대화가 통하는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있을 때 내가 얼마나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보다도 상대의 말을 내가 편하게 듣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리고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상대방의 모든 말이 편하게 들릴 수는 없다. 다만 그 사람과 있을 때 그래도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보다 들어주게 되는, 그리고 대화를 통해 이해하게 되는 비율이 높다면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그 사람과 만나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연인관계에서, 부부관계에서 대화가 왜 그렇게까지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두 사람이 정말 많은 것을 함께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니 20-30년 넘게 산 부부도 서로 본인의 생각을 표현해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사실 연인이나 부부관계에서 대화만큼 중요한 건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 간의 대화를 할 때 두 사람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난 상대와 있을 때 내가 상대의 말을 얼마나 듣고 있는지, 상대가 말하는 내용이 내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와 닿는지를 대화할 때도,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돌아보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이건 사실 20대에 실컷, 화려하게 놀던 형이 30살에 결혼할 때 해줬던 말이다. 그렇게 화려하게 놀던 형이 너무 일찍 결혼을 하게 됐고, 당시 20대 중후반이던 나와 친구들은 그 형에게 왜 그렇게 빨리 결혼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 형은 '이 사람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불편한 게 없어'라고 하더라.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도 30대 중반이 되면서 그 형의 말이 더 깊게 와 닿는다. 사실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의 좋은 점 보다도 부정적인 면이 더 눈에 많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콩깍지가 씌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호르몬 작용이 약해지면서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하지만 사람들마다 갖고 있는 한계가 모두 다르며, 수용 가능한 한계나 부정적인 면 역시 개인별로 편차가 있기 마련이다. 이처럼 어차피 완벽한 사람은 없고 인간은 모두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에, 상대가 갖고 있는 한계가 내게 얼마나 불편하고 거슬리는지가 사실 상대의 좋은 면보다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상대방의 좋은 면만 보일 때 결혼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부족함과 한계, 부정적인 면도 눈에 들어올 때, 그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과 일상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란 마음이 들 때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세 가지로 표현을 했지만, 내가 상대방의 조건이 아니라 상대와 있을 때 내 마음과 상태에 더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어느 순간 상대방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의 외모, 성장환경 등의 조건들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소개팅이 많이 들어올 때 상대방의 조건을 기계적으로 따지면서 만날지 여부를 따지는 내 모습이 어느 순간 혐오스럽게 느껴지더라. '상대방도 하나의 인격체인데 내가 어느 순간 상대를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던지 간에 그 사람도 그 사람의 가족에서는 사랑받는, 소중한 딸이 아니겠나? 그런데 그런 사람을 평가할 자격이 내게 있나?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고, 누구에게도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을 놓고 자판을 튕기기보다 상대와 만났을 때 내 마음이 어떨지에 더 집중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편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 것이 조건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과 가장 다른 것은 상대방과 만나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남 탓'을 하지 않게 된다는데 있다. 내 마음에 더 집중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상대방과 잘되지 않았을 때 소개시켜준 사람 탓을 하거나, 상대방을 평가하기보다는 '내가 조금 더 큰 사람이었으면, 조금 더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그 사람과도 만날 수 있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나를 위해서 더 좋은 일이더라.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나라고 상대방의 조건을 가지고, 확률 싸움을 해보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러한 확률 싸움보다는 상대방을 만났을 때 내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 더 정확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처음에 느꼈던 불편함과 어색함을 감수하고 누군가와 만났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왜 그 불편함과 어색함이 느껴졌는지를 알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서 상대와 헤어지게 되더라. 그런 경험을 하면서 상대방의 조건을 머리로 따지기보다는 상대방과 있을 때 나의 마음, 그리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너무나도 이성이 중시되는 사회에 살기에, 우리는 항상 뭔가를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하지만 인간이 어디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객관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합리적인 추론을 하기에. 사실 그래서 그러한 한계를 갖는 인간의 이성보다는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감정과 감성이 움직이는 방향이, 함께 있을 때 행복할 사람을 더 정확하게 판별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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