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자살하는 인물들
성경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사울도, 가롯 유다도, 삼손도 자살을 한다. 그런데 사울의 경우 오히려 전쟁 영웅의 예를 갖춰서 장사를 지냈고, 삼손의 자살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의롭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가롯 유다의 경우에도 성경에서 그가 자살을 했다고 해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 또는 판단을 하는 구절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이 마지막 회개를 거부한 중죄라고 믿었지만 칼빈의 경우 자살이 성령 모독만큼 중한 죄는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자살에 대해서는 성경도, 신학자나 기독교적 신앙을 가진 철학자들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자살한 사람은 곧바로 지옥에 갈 것이라는 판단을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연좌제처럼 그 남은 가족들에 대해서도 비판과 판단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안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할 그 가족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그들의 사랑하는 자가 지옥에 갈 것이라고 굳이 그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성경이, 예수님이 말하고 보여주는 사랑인가?
자살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옹호하고 싶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자살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아니 몇십 번은 했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 있었다. 인생은 꽉 막힌 것 같고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상황에 말이다.
하지만 내 발목을 잡은 것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경우 남겨질 가족 때문이었다. 우선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느꼈던 고통의 감정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원형탈모증도 생겼을 때도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만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 힘든 일이라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사실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까지 갔을 때는 항상 내 가족이 눈 앞에 아른거려서 그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이 더 컸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되면 그 이후에 어머니, 아버지는 하루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날이 없으시지 않겠나? 부모님께 그런 고통 속에 사는 지옥을 드릴 수가 없어서 그때마다 내 힘으로 조금씩 더 버텼던 것 같다.
그렇다. 사실 자실은 굉장히 이기적인 행위다. 자기중심적으로, 본인만 생각할 때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극단적인 선택하는 것 자체를,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을 옹호하거나 변호할 생각은 절대로 없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판단할 생각도 없다. 정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까지 가봤던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나는 상상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이 느끼는 고통의 강도가 나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기에.
어떤 이들은 '그 정도 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느냐'라고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우리는 모두 내면에서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비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결과를 유발한 결정적인 원인 또는 tipping point만 보고 그들의 결정을 비난하고 판단하지만 사실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 이전에 쌓여온 마음의 고통이 훨씬 더 많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니 최소한 진짜 기독교인이면서 예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 유가족과 같이 아파하는 것이 정상이지 그에 대한 판단과 비난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지 않을까?
만약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지인이었다면 기독교인 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하기 전에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 가족과 그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같이 아파해주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다. 당신의 가족이 지옥에 간다고 판단하고 지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성경 어디에도 자살한 사람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정답이나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이 특정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한단 말인가? 그것이야 말로 비성경적인 행위인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낀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입 밖에 낸단 말인가... 그 사람이 느낄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면 그런 말은 꺼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성경도 분명하고 완전한 정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신의 판단으로 그렇게 율법주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찌르지 않아도 충분히 스스로 힘들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다시 하는 것이야 말로 비성경적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벌하실 행위일 것이다. 그러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인간이 할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살면서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고통은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서 한 사람 마음 안에 일게 되는 고통의 양이나 강도는 모두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뭐를 그렇게 힘들어하느냐고, 그렇게 힘들 일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도 그럴 권리를 갖지 않는다. 누구도 제삼자가 느끼는 고통과 아픔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입체적인 상황과 성장배경을 모두 알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는 사실 많지 않은가? 어느 누가 자신의 속에 있는 고민과 생각을 모두 다 털어놓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구조해주거나, 목숨을 살려내면 당장 깨어났을 때는 '왜 내가 죽지도 못하게 하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구해줘서 고맙다'라고 하거나 처음에는 원망스러워도 시간이 지나면서 살려준 사람이 고맙다고 하는 경우도 꽤나 많지 않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현실에만 매몰되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세상이 끝나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 지점에서 조금만 머리를 들어서 주위를 살펴보면 사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이유가 더 많다.
그리고 지금 당장 모든 것이 끝날 것 같고 내 앞 길도 칠흑 같이 어둡기만 할 것 같을 수 있지만 인생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도 아직은 인생에서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고, 내 앞길 역시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이제는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 등을 보는 시각이 변하다 보니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라진 것을 발견한다. 브런치에 연애에 대한 글이나 한적하게 쓰고 있는 인생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지난 4-5년간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왔고, 지금도 객관적인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과 시선이 달라지니 세상이 그렇게 힘들고 무겁게만 느껴지지는 않더라.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상황에 노력하면 상황이 객관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노오력'을 하지 않아서 지금의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인생에서는 가끔보다는 조금 더 자주,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고통스럽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그 상황은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4-5년 간 버티고, 버티다 보니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변하고 그에 따라 내 행동이 변하며 그에 따라 내 주위 사람들도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최근에 조금씩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도 인생이, 사는 것이 조금은 더 행복해지더라.
그래서 이 순간 각자 자리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을 경험하는 분들께 조금만 더 잘 버티고 힘을 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당신은 그 존재만으로 소중하고, 존재의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함께 말이다. 또한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아도 당신을 마음으로 응원하고 마음을 쓰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사실도 같이. 그 시간을 잘 버텨내고 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까지 힘들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만 주위 사람들을 챙기고 정서적으로 기댈만한 나무가 되어 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말이다.
'한국교회 >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인의 말, 표현 그리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0) | 2020.12.17 |
---|---|
프리랜서의 십일조 단상 (0) | 2020.12.16 |
한국교회와 돈 (0) | 2020.12.02 |
교회, 의심, 질문, 목회자의 금전적 보상과 세금 (0) | 2020.11.21 |
비전, 소명 그거 함부로 말하는거 아니다 (0) | 2020.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