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하나님 나라' 얘기를 했지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
어렵게 설명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난 박진영씨 처럼 복잡하고 현학적으로 하는 설명들, 특히 하나님이나 신학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저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숨겨 놓으셨을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이해할 능력이 있진 않을텐데?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삶의 무게로 인해 그럴 여유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무엇이든 최대한 그것을 공부하거나 고민하지 않은 사람도 단숨에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는 나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린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모든 것을 통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인지가 문제가 되는데, 사랑은 감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보통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신체에 있는 호르몬 작용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욕구와 욕망들을 포괄하는 개념인데, 그런 현상은 사랑의 부수적인 효과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그게 사랑이라면 세상에는 이성에 대한 사랑만 있겠네?
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다. 상대의 흠결까지도. 부족한 면과 상처도. 그것을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안아주고 그 사람을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괜찮다고, 부족한 면이 있어도 괜찮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게 사랑이다.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상태보다 이해가 필요하다. 상대가 특정한 성향을 왜 갖게 됐는지, 특정한 반응을 왜 보이는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그것을 이해해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우리는 모두 그것밖에 되지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더 잘 이해한다. [상처받은 치유자]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엄청난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우린 우리가 힘든만큼, 상처를 많이 받고 그것을 받아들인 만큼,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이 내 자신이 변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만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도 순간순간 욱하겠지만, 그래도 다시 이성적으로 그 감정적 변화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부로 힘든 상황에 우릴 넣어야 한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차피 힘들고, 상처받게 되어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건 이 세상에 악하고, 이기적이고, 하나님의 나라와는 반대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처받고 힘들어지는 것은 필연이지 선택이 아니다. 만약 본인은 '난 그렇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의 속도에 맞춰 달려가느라 그 상처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마치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링 안에서는 상처를 입고 뼈가 부러져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린 모두,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광야의 시간은, 그 상처를 보고, 직면하는 시간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아파왔고 어떤 면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직면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광야의 시간은 고통스럽다.
그런데 광야의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습을 직면하는 그 시간이 없으면, 우린 절대로 그 상처들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린 세상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피투성이가 되어갈 것이다. 격투기 선수들이 링에서 빠져나와 하루밤을 자고 일어나서 긴장이 풀렸을 때 자신이 입은 상처들을 느낄 수 있듯이, 인생이 멈춰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만 서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린 우리의 상처들과 우리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할 수 있다.
그 상처는 하루 아침에 치유되지 않는다. 우린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평생을, 상처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치료하지 않고 계속 깊어져 온 상처를 하루 아침에 치료할 수 있을까?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이, 수술을 하는 것이 고통스럽듯 광야에서의 시간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움은 그 상황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가 그만큼 깊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황에 있는게 아니라 내게 있단 것이다.
그리고 상처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인간을 통해 올 수도 있다. 괜찮다고. 당신은 지금 당신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괜찮다면서 옆자리를 지켜주는 사람을 통해 우린 상처가 회복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런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작용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본인의 아들을, 우리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치유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죽는다고 생각해 봐라. 총탄이 날아드는데 누군가 그 앞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고. 그런데 이건 그보다 더한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자를 우리 대신 죽게 하신 것이다. 부모가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 마음은 부모된 자들이 가장 잘 알지 않을까?
그 사랑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감동은 어마어마하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회복되고 우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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