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compassion for these people; they have already been with me three days and have nothing to eat. If I send them home hungry, they will collapse on the way, because some of them have come a long distance.'...He sighed deeply and said, 'Why does this generation ask for a miraculous sign? I tell you the truth, no sign will be given to it.' (마가복음 8장 2-3절, 12절)
*오병이어에 대한 생각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지만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화를 내신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기적에 연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병이어에 대한 설교도 사람들이 그 많은 것을 다 먹었다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았다는데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핵심은 그 기적이 아닐 듯하다. 이전 묵상글에서도 썼지만, 기독교인의 시선에서 세상이 말하는 기적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놀라울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기에 이 땅을 갖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지은 사람은 그 건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듯이. 그 기적은 우리의 시선에서 기적이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기적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실 수 있는거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든지 인간의 기준에서 기적인 것을 일으키시지 않는 것은,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따라 다르다. 부모가 아이에게 맛있는 사탕을 항상 주지 않는 것은 왜인가? 아이들은 항상 사탕을 원하는데. 그 사탕을 먹은 아이의 즐거움과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가나? 얼마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탕이 아이와 부모 간의 관계의 본질적인 부분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사탕은, 사탕일 뿐이다.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그 사탕을 공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다. 기적은, 인간의 기준에서 기적은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시기와 장소에 허락하신다.
그런 맥락에서 오병이어에서의 핵심은 사실 먹고 남은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셨는지에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온 자들이었고, 말씀에 굶주린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참을 또 돌아가야 하는데 그 길에서 먹을 것이 없었다. 누군가 그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여기에 와서 들은 말씀을 돌아가는 길의 어려움 때문에 잊어버릴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을 먹이셨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다른 기적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기적들은 다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었고, 간절함이 있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함 받는 것이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고, 그 진정한 의미에 따라 사는데 도움이 될 지점들에서 일어났다. 핵심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데 있다.
And wherever he went-into villages, towns or countryside-they placed the sick in the marketplaces. They begged him to let them touch even the edge of his cloak, and all who touched him were healed. (마가복음 6장 56절)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랐다는 말씀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사두개인과 바리세인들이 아무리 영향력이 크다고 한들, 만약 예수님을 이렇게 따랐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반대했다면, 저항했다면 그래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까?
군중은 많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고 그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예수님도 이를 아셨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이렇게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 무리에 집착하지 않으신 것은 인간의 그런 면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무리가 있다고 하지만, 말씀에 나오는 수많은 무리의 사람들 중 상당수, 어쩌면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다시 본인이 살던 기준대로 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수 있었던 상황이 설명도, 이해도 되지 않는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버터지 않는다면.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이악물고 버티지 않는다면, 우리도,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떠날 것이다. 우리가 매일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못박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He went on: "What comes out of a man is what makes him 'unclean.'..All these evils come from inside and make a man 'unclean.' " (마가복음 7장 20, 23절)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음으로 인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
여기에서는 무엇이든지 먹어도 된다는 부분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내면과 내면과 내면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의 관계가 더 중요한 듯하다.
우리의 내면에는 더러운 생각, 마음이 있다. 그건 이 말씀의 전제다. 인간 안에는 원죄가 있고 우리는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성경의 기준으로는 죄를 짓는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표출하느냐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셨다. 우리 안에 더러운 것이 있지만, 그것을 우리 안에서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갖고 나가고 밖으로 나오지 않게 통제하고 조절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래야 우리가 주위 사람과 사회에 악한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도 지키고, 입과 행동으로 나가는 것들도 지켜야 한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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