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 seal of the righteousness that he had by faith while he was still uncircumcised. So then, he is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but have not been circumcised, in order that righteousness might be credited to them. (로마서 4장 11절)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생기고 나서 그 징표로 세레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질까 말까 해서 교회에 가는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것이다. 우리는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을 갖게 되면 선한 행동은 하게 되어 있다.
무엇이 본질인지, 잊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노려해야 한다. 한끗 차이가, 하늘과 땅보다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모든 것은,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다.
Without weakening in his faith, he faced the fact that his body was as good as dead-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and that Sarah's womb was also dead. Yet he did not waver through unbelief regarding the promise of God, but was strengthened in his faith and gave glory to God,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로마서 4장 19-21절)
하나님께서는 왜 이 땅에 기적을 일으키셨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기적을 행했을까? 그건 아마도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적과 능력이 아니었다면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을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해서, 기적을 본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도 그랬다. 구약에는 모세가 이집트를 떠날 때 마술사들이 똑같은 마술을 행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나? 의심이 많은 인간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도 기적은 하나님도 일으키실 수 있지만 악한 영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 때문에 성경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지 않으시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그냥 우리랑 똑같은 수준인 것을 우리가 왜 믿어야 하냐고 했을 것이다. 000하면 000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이브할 때야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성경에 나온 기적들을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은게 있다. 이는 성경에 있는 책들은 하나의 책으로 묶인게 아니라 따로 존재했던 것들이란 사실이다. 어떤 책은 편지였고, 어떤 책은 역사서였고, 어떤 책은 문학책이었다. 한 사람이 쓰지 않은 책에 누가, 왜,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기적을 지어내서 쓸까? 그럴 이유가 없다. 우리는 작은 하나, 하나의 사건들을 갖고 시비를 거는데, 그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그런 거짓말을 지어낼 유인이 없지 않나? 우리가 그걸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데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믿어야만 할까? 그래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않으면, 우린 세상의 기준으로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당신이 있다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도록 할 수 없다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믿으면, 그건 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준다. 내가 갈 길을 막으시고, 내가 원하는 걸 주지 않으셨다면 이유가 있을거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날 이 땅에 보내셨으니까. 내가 정말 가야[만]하는 길이라면 길을 열어주셨을거야. 그렇다면 지금 좌절하지 말고, 어디로 가야할지 일어나서 고민하고 생각해보자. 라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하나님을 더 붙들게 된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Not only so, but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 because we know that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로마서 5장 3-4절)
이 말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어 성경을 읽지 않고 영어 성경을 읽는 것은 이런 지점들 때문이다. 한국어 성경은 번역의 뉘앙스에 있어서 번역을 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이 묻어있는 대목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의역이 필요한 부분도, 한국어 성경은 직역을 한 경우가 많다.
고난은 인내를 길러주고, 인내는 성품을 만들어 주며, 성품은 소망함을 준다는 이 말이, 내가 그 과정을 겪기 전까지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제는, 이해가 된다. 뭉클했다. 진리는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그것도 알아보지 못했구나... 란 생각에 회개하게 되었다.
고난이 인내를 길러주고, 인내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성품을 만드는데까지는 대부분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힘들어보면, 다른 사람들의 힘듦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도 더 좋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성품과 소망함이 이어지는게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서 성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성격, 착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그게 이해될 수가 없다. 여기에서 성품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Character라는 표현은 그냥 성품의 의미가 아니라 조금 더 전인격적인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그 사람의 성격, 성향성을 표현할 때도 우리는 he has a character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서 잘 드러난다.
그런 맥락에서 이 말씀을 해석하면, 이 말씀은 고난은 인내를 만들어내고 인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만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인내하는 법을 알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되고, 받아들이게 된단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알게 되면,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행하시는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왜 어떤 길은 막고, 어떤 길은 여셨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면, 우리 삶에 일어난 일들이 하나의 frame으로 합쳐지면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게 되며, 하나님을 진짜 믿을 때 지속가능한 소망함이 생긴다.
이 생각이,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들어서, 공감되어서, 감동이 밀려왔다. 뭉클하다. 창 밖에 빗소리가 지금 내 마음에 너무 어울려서, 또 감동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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