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Let him who boasts boast in the Lord.' For it is not the one who commends himself who is approved, but the one whom the Lord commends......For to be sure, he was crucified in weakness, yet he lives by God's power. Likewise, we are weak in him, yet by God's power we will live with him to serve you. (고린도후서 10장 17-18절 / 13장 4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연약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내 힘과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자들을, 광야에서의 시간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광야에서 단련시키시는 것은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혹자는 너무 잔인한 훈련이 아니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곳에 내쳐진 상태로 그렇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묻자. 당신이 만약, 3년간 미친듯이 일하고 몸도 상해가도록 일한 후에, 3년만 시키는대로 일하고 나면 30억을 준다고 하자. 당신은, 그 3년을 이를 악 물고 버티겠는가?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버틸 것이다.
그런데 30억, 생각보다 쓰기 쉬운 돈이다. 집 한채 사고, 차 한채 사고, 조금 맛있는거 먹고 놀러다니다 보면, 빠르면 1년 안에도 충분히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광야에 들여보내시는건, 광야에서 잘 훈련된 후에는 평생, 죽을 때까지 평안함 안에서 사는 원리를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완전한 신뢰가 있다면 광야에서의 시간이 고통스럽고 힘들 이유가 없다. 광야의 시간이 우리에게 힘든 것은,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하나님만 붙들고 사는 연습을 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의 힘으로 이겨내기엔 세상이 얼마나 강한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붙들고 길을 여시고자 하면 세상은 얼마나 별 것이 아닌지를 몸과 마음으로 믿고 알게 되는 과정이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에서는 지금 당장 실패를 하더라도, 그 실패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것이라 믿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그래서 강하고, 좌절하지 않는다. 지금 나의 실패가, 나의 뜻과 계획이 무산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으니까. 이 땅에서, 세상의 기준에서의 실패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실패가 아니니까.
그 담대함은, 강인함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기준에서의 실패 앞에 완전히 무너질테니까. 기독교인이라고 다르겠나?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약하지만, 내가 진짜로 온전히 믿는 하나님은 강하심을 믿기에 다시 일어나는 것. 그게 기독교인의 삶이다. 그래야 한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지시는 시간이다.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I promised you to one husband, to Christ,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to him. (고린도후서 11장 2절)
예전에는, 아니 오늘 이 말씀을 읽기 전까지도 '처녀'에 대한 비유들이 불편했다. 왜 굳이 처녀인지, 처녀는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쓰여진듯해서, 처녀가 아니면 순수하지 않은거냐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문득, 적절한 비유란 생각이 들었다. 처녀가 아니라 총각으로 바꿔도 이는 같은 의미다.
첫 경험. 첫 사랑. 누구나 그건 강렬하다. 그리고 다른 계산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에 충실하게 한다. 상대의 조건과 가정, 환경이 아닌 그 사람만 보고 푹 빠지는 것. 그 경험은 꽤나 강렬해서, 항상은 아니더라도 이따금씩 그 때의 기억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뭐든지 첫 경험이 중요하다. 그 경험이 상처로 가득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갈테니까...
그런 순수함.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다른 것은 보지 않는 것.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처녀'의 비유들의 의미일 것이다.
Since many are boasting in the way the world does, I too will boast. (고린도후서 11장 18절)
이 부분 이후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고, 사도들보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예전에는 이게 참... 오만해 보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이러나 싶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현실을, 세상을 알아가게 되면서 생각이 조금은 바뀐다. 바울은 세상이, 인간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 지를 알았던 것이다. 이 말들 앞에는 전제가 붙는다. '당신들 기준으로 내 삶을 한 번 봅시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그들 방식으로. 세상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앞세우니까. 그렇게 따져서 내가 뒤지는지, 당신들 방식으로 한번 보자는 것이다. 균형을 잡는 건 쉽지 않다. 균형이 잡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한 때, 아니 사실은 아직도 마음에서 순수하게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그대로 인정받고 싶단 마음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평생을 하겠다는 약속을 해주는 사람이 나의 조건과 배경을 보지 않고 순수하게 내가, 인간으로써, 개인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만을 보고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나를 신뢰할 수 있다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마음만 보고 신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의 글과 생각이 나의 세상적인 조건과 상관 없이 읽히고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단 마음이 있다.
하지만 세상이,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인간도, 세상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게 주어진 것을 도구로 활용은 하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필요할 때는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들이 날 인정하거나 받아들여도 담담하게,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으니, 그 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내가 그걸 내세우지만 말고, 남들이 그걸 기준으로 날 인정해주면 그냥 받아들이고 가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세상이 그걸 보고 날 판단하겠다면, 그건 그러라고 해주기로 했다. 나와 평생 함께 할 배우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관계가 시작될 때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쉽지 않은, 바울처럼 균형을 잡아야 하는 일이다. 내가 매일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묵상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난 이렇게 매일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붙들어 놓지 않으면 그것을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매몰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온다. 무릎...까지 꿇지는 않았지만... 글은 써야 하니까...:)
'말씀묵상 > 말씀 묵상-202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라디아서 4-6장 말씀 묵상 (0) | 2020.12.02 |
---|---|
갈라디아서 1-3장 말씀 묵상 (0) | 2020.12.01 |
고린도후서 7-9장 말씀 묵상 (0) | 2020.11.29 |
고린도후서 4-6장 말씀 묵상 (0) | 2020.11.28 |
고린도후서 1-3장 말씀 묵상 (0) | 2020.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