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내가 사용하는 공유 사무실로 길을 나서며 내가 지금까지 써 온 사랑,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내년 3월이면 무려 3년 동안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건데, 나도 글을 이렇게 오래 쓰고 있을지는 몰랐다. 이 주제에 대해서. 내가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잡고 학위를 받을 때까지 약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니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난 내 박사학위 논문을 쓴 기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구독을 오래 해오신 분들이나 나중에 하셨어도 내 이전 글들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사이에 몇 번이나 이 주제에 대한 글을 그만 쓰려고 노력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른 주제들로 또 쓸 이야기들이 나오더라.
어떤 이들은 네 연애나 하면서 그러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나, 이전에도 그런 내용의 글에서 썼듯이 역설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게 가능해지는 면이 있는 듯하다. 만약 내가 연애 비법, 결혼생활 잘하는 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또 다를 것이다. 하지만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나의 글들은,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정의 얘기를 이성으로 쓰는 편이다 보니 오히려 연애와 결혼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해 준다. 그게 내 일이라면 한 걸음 물러나서 그에 대한 글에 쓰기가 쉽겠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로 나오던 중에, 사랑,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을 꽤나 오래 써오는 과정에서 '결혼은 꼭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서 내가 극단적으로 이성적인 측면에서 YES라고 결정한 이유에 대해 이번에는 좀 써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연애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 감정적인 부분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마치 음식물쓰레기를 건조하는 기계에 음식물을 넣고 나면 말라비틀어져서 나오는 결과물처럼 건조하고, 이성적으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연애보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먼저 써야 한다. 왜냐하면 정말 이성적으로만 접근을 하면 연애는 결혼까지 가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결혼'은 법적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결혼을 의미하지 단순히 동거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단 것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렇다. 무려 2년 반이 넘게 사랑,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 문자 그대로 수백 개의 글을 쓰고 나서도 난 여전히 결혼은 인간에게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이는 인간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전제로 하는데, 난 인간은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순간에 그러하지 못하며 이성보다는 감정과 감성에 의해서, 균형 잡힌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본인의 한도 안에서 자신의 왜곡된 시선으로 결정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훈련시켜주지 않고, 사회에서는 항상 편 가르기를 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특성인 듯하기도 하다.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난 사회적으로 구속된, 혼인신고서라고 포장되어 있지만 그 실질을 들여다보면 혼인'계약'과 같은 법적인 혼인이 사실은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렇게 계약으로 맺어져 있고, 서로 함께 부부일 것이 어느 정도는 강요받지 않는다면 인간이 그 관계에 충실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어느 정도의 감정 또는 감성의 동요로 인해 그 관계를 끝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로 완전히 혼자 살 수는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것으로 '자발적으로' 상대에게 구속되겠다고 받아들인 경우에는 국가에서 그 사람이 흔들려도 그 관계를 쉽게 깰 수 없게 구속해 주는 것이 결혼이라고 난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서 '국가가 개인을 구속한다는 게 말이 되냐?'라던지 '그게 과연 개인을 위해 좋은 거냐?'라거나 '그럼 결혼은 깨면 안 되는 것이냐?'라고 할지도 모른다. 우선 이 경우에는 국가가 개인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유의사에 의해서 그 관계에 구속되겠다고 한 것을 국가가 강제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다른 영역에서 우리가 자유의사로 계약을 체결하지만 그 후에는 그에 구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도 우리의 자유의사로 결정한 후에 그에 대해 구속이 될 뿐이다. 그게 개인을 위해 좋은 것인지는 그 결정을 내리는 본인이 판단해야 할 문제이며, 계약도 깨질 수 있듯이 결혼도 깨질 수 있다.
그런데 결혼이 깨지는 사례, 또는 이혼을 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은 경우에 본인이 '계약'을 체결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연애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수준의 무엇인가를 한다고, 감정적으로 좋으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믿고 결혼을 하는 듯하다. 뭔가 '결혼'이라고 하면 로맨틱하고, 다 괜찮을 것 같고, 남들이 이 정도 나이에 하니까 또는 이 정도 만났으면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 환상은 보통 결혼식을 준비하고 함께 살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깨어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 그렇대. 결혼하면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그 길을 간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하는 사람들, 또는 같이 살지만 함께가 아니면 더 행복한 상황을 버티며 사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결혼에 대해서 쉽거나 나이브하게 생각한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두 사람이 최대한으로 이성적인 모드로 들어가서 그 순간에 따질 수 있는 변수들을 다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없는 것, 미래에 어떻게 될지 두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상대와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결혼은 서로의 민낯을 다 보고, 상대방에게 최대한 솔직하고 나서 결정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 결혼을 할 때야 비로소 위에서 내가 설명한 '계약으로써의 결혼'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연애는 결혼의 같은 선상에 있단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윗 문단에서 나는 마치 우리가 최대한 이성적으로 서로에 대해 파악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이 설명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이 성적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심지어 그렇게 이성적이기를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게 잘 맞는 사람도 사실 자신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가 있는 상황에서 완전히 이성적이기는 힘들고, 그렇게 이성적이라 하더라도 그건 두 사람이 각자의 입장에서 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내린 결론이 '객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직면하는지에 따라 사람은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결정도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성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은 두 사람 간의 신뢰다. 그리고 그 신뢰는 이성과 말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이 사람은 이럴 때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행동할 줄 알며, 어떤 말은 잘 들어주지만 다른 말은 고집이 있어서 듣지 않는 편이라는 것을 알 때, 그리고 그걸 자신이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두 사람 간에 신리가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뢰는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더 생기고 깊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애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상대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신뢰도 함께 형성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저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줄 수 있다는 신뢰, 내가 어느 정도까지는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 말이다. 자신에 대한 그런 신뢰가 없는 사람은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과 연애를 하는 사람은 힘들 수밖에 없기에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신뢰하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성을 강조하는 것을 '결국 조건을 보라는 거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라는 의미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우려가 된다. 물론, 상대의 조건이 좋은 게 좋다. 그리고 상대가 상황이 힘든 것보다는 여유가 있는 게 많은 것을 편하게,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의 재력, 학력, 집안이 상대와의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걸 보는 걸 '이성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걸 '이성적으로 따진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상대방의 그런 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그걸 따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건 오히려 '감정적'인 부분을 충족시켜 주는 게 아닐까? 이 정도 외모, 이 정도 재력, 학력, 집안의 사람을 내가 옆에 두고 있다는 생각에 드는 뿌듯함 또는 안도감 같은 감정 말이다.
이 글에서 내가 강조하는 '이성'은 상대의 작은 디테일들과 자신의 성향을 의미한다. 예전에 서로 생각하는 방향성, 삶을 대하는 태도, 가치관, 세계관이 너무나도 잘 맞아서 소개팅 한 날도 11시가 넘어서까지 대화가 끊이지 않고 그 후로 2주 동안은 매일 몇 시간씩 통화를 했던 친구가 있었다. 지금도 그 친구와 나는 그런 큰 틀은 상당히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 친구와 나는 어느 순간 작은 것들 때문에 데이트가 끝날 때 즈음에는 싸우고, 헤어지고 나서는 통화를 10분 정도만 하면 다시 화해하는 패턴으로 연애를 이어갔고, 결국 그런 패턴에 지쳐서 헤어지고 말았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 친구와 내가 그러했던 것은 우리 둘이 서로의 '크고 중요한 것'을 너무 잘 알고 그게 잘 맞는다는 것을 '이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알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보니 서로의 작은 성향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둘은 서로에 대해 크고 중요한 것을 잘 알았기에 무의식 중에 작은 것들은 다 알고 이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만난 기간 동안에는 서로의 닮은 점에 빠져 작은 부분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보니 둘의 관계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우리는 데이트를 항상 다툼으로 끝내는 연인이 되어있었다. 그때 우리 둘 다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봤다면 어땠을지를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연애에도, 결혼에도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작은 디테일들이다. 그리고 그걸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이성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기에, 그런 인간이 실수하는 것을 방지해 주는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닐까?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에게 있다. 나이브하게 괜찮을 거라고, 사랑하니까 다 될 거라고, 남들이 이 정도면 결혼하니까 나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식장에 들어가고 함께 살기 시작하는 인간에게 말이다.
그렇게 결정한 결혼은 물려도 된다고 난 생각한다.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랑, 연애 그리고 결혼 > 연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녀 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0) | 2020.12.10 |
---|---|
소개팅 주선의 고달픔에 대하여 (0) | 2020.12.05 |
소유하지 못해도 '사랑'일 수 있다 (0) | 2020.12.04 |
연애, 몇 살부터? (0) | 2020.12.03 |
연애와 외모 (0) | 2020.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