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박사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요.'
내가 기획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한 드라마의 기획 PD님께서 하신 말이다. 법학박사이고, 법적인 부분 때문에 들어와 있으니 왠지 박사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고 말이다. 절대 그러지 마시라고 했다. 내가 그 팀에서 같이 일하는 것은 '박사'가 아니라 법을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고, 내 역할과 계약관계가 '법률자문'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법학박사가 아니라면 내가 그 팀에 합류하지도 못했겠지만, 내가 박사로 공부한 것을 일하는데 활용하는 것이 아니며, 나의 계약서에 '자문'이 업무로 들어가 있지 않은데 내가 박사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게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박사학위는 그에 대해서 그 '업계'에 계신 분들이 '자네는 한 주제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연구해 본 경험이 있으니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야'라고 인정해 준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기 때문에 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부끄럽지 않다. 까다롭고 기준이 높은 분들이 내 커미티에 계셨고, 그분들이 통과시켜 주신 것은 내가 한 번은 제대로 연구를 해봤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난 오히려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내 박사학위 전공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면 '박사'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내 전공 관련 영역에서 아직도 내게 습관적으로 '조교'라고 부르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그럴 때는 움찔하며 살짝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박사'일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내가 항상 박사여서도 안된다. 사회에서 가장 꼰대스러운 사람은 사실 본인이 한 분야에서 잘 나갔다는 이유로 그 성과를 다른 분야에서도 인정받고 일정 수준 이상의 대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한 분야에서 자신이 성과를 이뤘다 하더라도, 다른 분야에 가면 그 분야에서는 본인의 경험만큼의 성과만 인정받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난 내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는 영역 외의 영역에서는 박사라고 불리기를 거부한다. 박사 자체가 나를 규정하는 요소일 수도 없고, 그러하길 나도 바라지 않으며, 난 내 박사 전공 영역에서만 박사이니까. 분명한 것은 그런 마음과 자세로 일을 해야 프리랜서로서 내 능력과 경험이 닿는 영역의 일까지 할 수 있게 된단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난 자연스럽게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그 드라마팀 안에서는 작가로, 내가 일했던 회사에 가끔 놀러 가면 과장으로, 내 전공 관련 행사나 일에서는 박사로. 그건 하나 이상 직종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프리랜서들은 때때로 그로 인해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그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갈린다. 혹자는 '능력 있다'던가 '르네상스 맨이네!'라고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아?'라던가 '넌 뭐 하는 애냐?'라고 하기도 하더라.
그런데 난 그저 내가 가진 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며 생계를 해결하고 내 인생을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내겐 그게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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