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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일상생활

3시까지 해줄 수 있을까요?

번역은 내 프리랜서 생활의 주업은 아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갖고 있고, 해외생활을 오래 했다 보니 가끔씩 번역 일거리가 들어온다. 그것도 내 경력과 배경의 특성상 보통 논문이나 법학, 정책학, 행정문서 관련 변역이 주로 들어오다 보니 단가도 꽤나 괜찮은 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게 주종이 아니면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게 낫지 않냐고 할지 모르지만,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않은 프리랜서에게 그렇게 일을 골라서 받을 여유 따위는 없다.

이번 일도 아는 동생을 통해 들어온 학위논문 초록 번역 일이었다. 6월 초에 번역을 의뢰하려고 하면서 '금요일에 드릴 테니 주말 중에 부탁드린다'라고 연락이 왔다가, 교수님께서 논문을 다 뒤집으라고 하셔서 맡기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던 건이었다. 중간에서 일을 소개해 준 동생은 나를 기다리게 해 놓고 펑크를 냈다며 난감해하고, 미안해했지만 학위논문을 써 본 사람 입장에서는 상황이 이해가 되었고 오히려 그 동생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학위논문 쓰다 보면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더라'라고 말을 해 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해하고, 그 일을 맡기려 했던 사람에 대해 화를 내는 그 친구의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렇게, 그 건은 내 손에서 슬며시 빠져나갔고 부수입을 올릴 생각에 살짝 생성될 뻔했던 엔도르핀은 만들어지다 말았다.

그렇게 잊혔던 번역 건이 갑자기 고개를 든 건 지난 금요일. 아침에 끙끙거리면서 '야 이 놈의 살은 언제 빠질까'라는 마음에 집중하며 아령을 들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학위논문. 번역] 발신자가 저장되어 있는 이름이었다. 이게 뭔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 하던 운동은 마무리해야 했기에 나는 귀로 열심히 강식당 재방을 들으면서 운동을 마친 후에야 문자를 확인했다. 그 시간이 11시 30분. 이제 아침을 먹으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서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문자 드려서 죄송한데... 혹시 오늘 3시 전까지 번역 의뢰 가능할까요? 제가 너무 급해서 너무 실례인 거 알지만 연락드려요ㅠㅠ"라고 문자가 와 있는 것 아닌가? 나 역시 학위논문 심사를 받아봤고, 급한 마음이 이해는 되었지만 내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 문서를 2-3시간 안에 번역해서 보내주는 건 조금은 버거운 과제였다. 더군다나 나도 내 연구와 관련된 리서치를 하려고 시간을 정해놨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의뢰를 하시면...

문자를 확인하고, 목으로 뭐가 넘어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해? 말어?'를 반복하던 중에 내 뇌리를 스치는 또 다른 생각은 '얼마를 받아야 하지?'였다. 번역일을 할 때 단가를 결정하는 방법은 굉장히 많지만 이렇게 긴급한 번역 의뢰는 보통 단가가 확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에는 단순히 '번역'이라는 노동 외에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일정'에 대한 대가도 받아야 하니까.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 마음은 이미 일은 받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말이다. 내가 일을 받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 번째는 학위논문 심사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초조해지고 마음이 급한 지를 알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언제나 그렇듯 전문 번역, 그것도 한영 번역은 단가가 꽤나 괜찮기 때문이다. 둘 중에 어느 요소가 더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그렇게 고민하던 끝에 난 처음에 얘기되었던 단가대로 비용을 얘기했고, 그 비용으로 3시가 조금 넘어서 번역본을 넘겼다. 당연히 내 마음에 드는 수준의 번역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시간과 번역물의 특성을 감안하면 최선을 다했단 생각은 들더라. 무엇이 내가 그 일을 받게 했고, 무엇이 내가 비용을 더 부르지 못하게 했을까? 그런 결정을 하는데 많은 요소들이 작용했겠지만, 그중에서 일단 돈이 되고 할 수 있는 건 해야 하는 프리랜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불법적인 것만 아니라면 돈이 되는 건 가능하다면 일단 하고 봐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