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천당 불신지옥' 명동에만 가면 누군가 외치던 구호.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의 8할 이상은 들어봤을 구호다.
이 구호에 대한 나의 생각과 마음은 수차례 바뀌어왔다. 어렸을 때는 막연한 반감이 있었다가, 저런 방법이 먹힐 것 같냐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저런 담대함이 있을까 싶으면서 방법은 지혜롭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은 알아주실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다시 바뀌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성경적인 구호가 아니다.
이는 성경의 핵심은 '사랑'인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 구호는 '나는 천국 가는데, 너는 지옥 간다. 그래도 안 믿을래?'라는 협박적이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시고방식을 전제로 깔고 있다. 이건, 성경적인 사고방식이나 마음이 아니다.
나는 상대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한다. 상대가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교회에서 주로 통용되는 표현은 지양하기 위해 노력한다. 상대와 의사소통에서 오해가 없고, 서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주관을 '신앙 없음'으로 간주할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안다. 담대하지 못하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도 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묻자. 그건 누구를 위한 담대함인가?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표현을 쓰는 건 누구를 드러내기 위함인가?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걸 드러내면 상대가 하나님을 믿게 되나? 그거 정말 하나님을 전하는 것일까?
그건 나의 평상시 행동이 바르고 성경적이며 구별되고, 세상에서 교회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을 때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상대에 맞춰서, 상대가 익숙한 표현과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배려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사랑과 배려지만, 나는 상대가 익숙하고 불편하지 않은 표현을 쓰는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과 노력들이 쌓였을 때, 상대가 내가 본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때 상대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궁금해하고 마음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육두문자를 최대한 쓰지 않는 것. 쉽게 분노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것.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바른 말을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하는 것.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모두 쉽지 않지만 일상에서 그러한 작은 실천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작은 실천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거기까지다.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상대 안에 축적된 경험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다. 그런 마음으로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잘 살아내는 것이 믿음의, 복음의, 신앙의 핵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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