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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혹은 개독/기독교인에 대하여

기독교의 십자가의 시작점

기독교의 핵심적인 상징은 십자가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신이 자신이 만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못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무자비한 형벌이었지만 기독교에서는 사랑의 상징이다. 절대자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인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이다. 자신은 완전무결하고 무죄였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알게 해주는 것. 그게 예수님이 이 땅에 보내지신 목적이었다.

그러셨던 예수님 삶의 핵심은 '내가 너희와 똑같이 이 땅에서 살아봤다'는 것이다. 그건 반대로 말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단 것을 의미하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약점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하나님 뜻이라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달라는 기도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삶의 핵심은 '작은예수'로, 우리 영역에서 예수님께서 살아내셨을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작점은 '내가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 나와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 모두 약점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해야 하고, 나 또한 완벽하지 않고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오만해질 수 없다. 내가 남보다 '전반적으로' 잘났거나 특별나다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비기독교적인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보고 상대를 하대하거나 깔보는 것 역시 비기독교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월등하고 우월하다면서 떠받드는 것도 비기독교적인 생각이다. 인간은 다 각자의 한계를 갖고 있고 몇가지 면에서 '상대적으로' 탁월한 면이 있을 뿐이고, 그 몇 가지를 들어서 누군가를 떠받드는 것은 그 사람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보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작은예수의 첫 걸음이다. 따라서 작은예수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필요한 말은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상대의 잘못을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을 전제로 존중하면서 표현해야 한다.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당신이 틀렸어!'라고 생각하면서 지적질하거나 그 권세를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걸 대하는 것 역시 나의 오만함이 구현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작은예수의 삶을 사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나보다 열위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존중하는 것이다. 아이, 가난한 자, 덜 배운 자 등 세상의 기준으로 낮거나 약한 자들을 나와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이 작은 예수의 삶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지 않았나?

이에 대해 혹자는 '실제로 특정한 점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사람이 있지 않나!'라고 할지 모른다. 맞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의 계획'을 전제로 하는 기독교에서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그 사람이 더 존귀하거나 높아질 이유는 없다. 그렇게 주어진,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갖고 태어난 능력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가 그걸 갖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 창조 원리를 회복하고 전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지 그 사람이 더 잘났거나 우월한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재능은 다를뿐 평등하지 않다. 이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높게 평가받는 재능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년 전만해도 숫자를 잘 다루는 재능이 뭐 그리 대단한 재능으로 취급받았겠나? 그런데 오늘날에는 코딩을 비롯해서 많은 분야에서 숫자를 잘 다루고 이해하는 사람의 재능이 높게 평가 받는다.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많은 지식을 머리에 담고 있고 암기를 잘 하는 능력이 높게 평가받지만 미국에서는 남들과 다른 시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능력이 높게 평가받는다.

200년 전만 하더라도 전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능력 중 하나는 신체적인 능력이었을 것이다. 천 년전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힘만 센 사람들은 평가절하되고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가진 능력이 더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운이 좋게 그게 가치있게 여겨지는 사회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여겨지는 것일 뿐이다. 반대로 내가 가진 능력이 가치가 없기 때문에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능력은 엄청나게 각광받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더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능력이란 것은 없다. 우리 시대에도 힘을 잘 쓰는 사람들이 필요한 영역이 있지 않나? 과거에도 숫자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필요한 영역이 존재했다. 사회가 유지, 발전하는데 필요 없는 능력은 없다. 고도로 발전된 기계에서도 나사 하나만 빠지면 그 기계가 기능을 할 수 없듯, 사회와 국가는 다양한 기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고, 우리는 상호의존적인 존재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들은 여전히 청소하거나 육체노동 하시는 분들을 보며 자녀에게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될거야'라고 하시는데,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그분들이 전부 일주일만 쉰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곳곳에서 썩은내가 진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분들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나? 집을 지으러 공사장에 일하러 나가시는 분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집 안에서 살겠나?

우린 모든 것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를 우린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옷 한벌, 책상 하나, 침대 하나를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있나? 그걸 다 우리 힘으로 만든다면 우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환경을 다 만들었을 때 죽을지도 모른다. 물건의 가치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의 가치는 아니란 것이다. 내가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내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기능과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덕분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난 그것을 인지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내가 힘을 들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해준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 나의 능력이 더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평등이고, 십자가의 시작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