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적지 않은 이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왜 악한 자들이 성공합니까?'라고 묻는다. 반대로 '왜 나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이렇게 실패하고 힘듭니까? 라고 묻는다. 나 역시 그랬다.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나누자면, 그건 아마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에 대한 부분은 이 논의에서 일단 배제하자. 그 부분은 나도 모르겠고, 하나님께 묻고 싶은 부분이다. 너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왜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부분은 정말 잔인하게 설명하자면 (1)하나님께서 그걸 적극적으로 일으키시는 것은 아니고, (2)그런 것에 개입하시는 순간 인간에게 맡기고 허락하신 자유에서 개입하거나 하지 않을 부분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3)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느껴지는 죽음의 의미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의미만 갖지는 않을뿐 아니라, (4)누군가의 죽음이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와 가치를 깨달아가는데 더 선하기 때문에. 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너무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이기만 한 분석이고 인간의 한계를 갖는 우리 관점에서는 그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그런 설명을 답인 것처럼 하면 하나님이 잔인하게만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그 부분은 일단 배제하고 가겠다.
사실 내 인생을 놓고 했던 고민이었다. 30대 초반까지는 나름 승승장구하면서 내가 노력했던 것 이상의 성과만을 올리며 살았는데, 갑자기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왜 그렇게 몰고 가셨는지를 돌아보고 물어본 끝에 40의 문턱의 시점에서 내린 내 나름의 결론이다.
그건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을, 이 땅에서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모든 이들을 동등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동등하게 사랑하시는데, 예수님이나 이 땅의 창조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기준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실패할 경우 하나님을 보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생각을 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상적인 필요를, 그들이 우상으로 삼는 것들을 허락하시는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을,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구현되는데 그들이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과 상황을 붙여주시면서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그들이 그런 기회를 놓치고 너무 멀어졌을 때, 마치 [경이로운 소문]의 악귀 3, 4단계처럼 되었을 때 그들을 치고 끌어내리시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서 '그렇다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사회적인 성공을 허락하지 않으시냐?!'고 반발할지 모른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사회적인 성공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일단 형식적인 측면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허락하시는 그러한 것은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모르는 악인과 같은 원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부유함과 풍요로움을 흘려보내도록 하시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경우다.
첫 번째의 경우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기복신앙을 갖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이 성숙하기 전까지 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세상적인 성공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그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버리고 멀어질 것을 아시기에. 그들의 경우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아니면 그들이 이제는 성경이 말하는 축복의 참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성공과 풍요로움을 제한하시기 시작하실 듯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교회가 더 망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후자의 경우 그가 복음의 진수를 깨달아 알고 더 깊은 신앙을 가질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말씀일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실 일을 위해서 세상적인 성공과 물질이 필요한 경우 그에게 그러한 풍요로움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공과 풍요로움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 베풀고 섬김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잠시 맡기신, 허락하신 것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성공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는 제대로 된 기독교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질과 성공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도구에 불과하니까.
이에 대해서 혹자는 '왜 누군가는 그런 풍요로운 삶이 필요한 삶을 계획으로 심어주고, 누군가는 소박하게만 살아가게 계획을 만드냐!'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모르는 것은, 그렇게 풍요롭고 많은 것을 맡은 사람은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자신과의 싸움을 더 치열하게 해야 하고, 그런 책임을 맡은 사람은 세상 속에서 더 많은 적과 어려움과 싸우며 살아야 한단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세상적으로 큰 사람은 그 안에서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더 많은 십자가를 지고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게 더 쉽고 좋기만 할까?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은 세상의 가치에서 자유로워지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안에 있는 자는 누가 더 갖고 덜 갖는데에 질투하거나 시기할 이유가 없다. 또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도, 더 풍요롭다고 세상의 기준으로 비싸고 좋은 것을 추구하고 자신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필요최소한의 것을 누리고, 최대한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니, 하나님 안에 거하면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물론, 나 역시 이 글을 머리로 쓰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마음과 믿어지는 듯한 감정으로 유지되고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 흔들릴 때도 그것을 이성으로 다잡으며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과 감성을 모두 허락하신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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