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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20년 봄, 제주

제주는 밤이 좋다.

서울의 밤은 너무 밝다. 최소한 내겐 그렇다. 어느 순간부턴가 본래 그러한  것은 그러하게 두는 것, 즉 가장 본질적인 것을 좋아하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며 살고 있는데, 밤의 본질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서울의 밤은 내게 너무 밝다. 글이 주로 어둠이 내리고, 서울의 밤이 고요해졌을 때 쓰여지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주는 밤이 좋다. 제주시와 서귀포 시내에 있지 않은 이상, 아니 그 안에 있어도 서울은 대낮 같이 밝은 11시에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시내에 있지 않으면 제주도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서 밝아지고 어두워진다. 그 어두움이 저녁에는 길이 아닌 네비를 보면서 운전해야 할 정도로 칠흑 같이 어둡지만, 난 그 어두움을 불편해한 적은 있어도 그에 대해 불평한 적은 없다. 밤은 어두워야 하고, 난 그 안에서 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제주의 밤.

내가 밤은 어두움 그 자체로 좋아하는 것은, 어두움이 내릴 때야 비로소 인간은 충전하고 휴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일을 하도록 몰아치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어두우면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고, 그렇게 외부적으로 제한이 가해지기 때문에 쉴 수밖에 없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서울에 있으면 그 행복은 당연하다는 듯이 박탈되지만, 제주에선 그 행복이 강제되어서, 나는 제주의 밤을 좋아한다.

사람다움. 내게 밤의 어두움은 사람다움을 의미하고, 그런 면에서 제주의 또 다른 사람다움은 제주의 동서쪽을 채우는 '속도'이다. 제주에서는 재료가 떨어지면 영업을 그만하는 식당들이 적지 않고, 게스트하우스들은 보통 4시, 느리면 5-6시에 체크인이 가능한 곳들도 있다. '게으른 소나기'는 1-2월에는 아예 방학을 걸어 놓고 주인 분이 여행을 떠나신다.

한 번은 너무 유명한 맛집이라 오후 2시에 줄을 서 있다가 재료가 떨어져서 오늘은 장사가 끝났다고 하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나보다 늦게 와서 덜 기다리신 분이 '재료가 떨어졌다고 장사를 그만하는 게 어디 있냐? 장사 안 하겠다고 하는 거냐?'라고 화를 내시더라. 그런데 '장사'가 공공재인가? 장사를, 영업을 늦게까지 해야 하는 의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개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는 거고, 본인이 돈을 덜 벌겠다는데 거기에 화를 내는 건 무슨 이유일까?

제주의 밤바다. 제주에도 밤을 밝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로 인한 불편함들은 있다. 본인 마음대로 가게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분들도 제주에는 적지 않다. 10년 동안 일 년에 한 번 밖에(?) 안 오다 보니, 10년 전부터 가고 싶었는데 문을 닫았거나 내가 묵는 숙소와 다른 쪽에 있어서 아직도 가보지 못한 식당들이 지금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이 싫지는 않다. 이는 그 가게에 가보지 못한 게 섬을 다시 올 이유가 되고, 다시 왔을 때 설레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 사람이 일을 덜하고, 덜 벌겠다는데 그 자유에 대해 내가 뭐라고 평가하고 판단한단 말인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겠다는 그들이야 말로 자유주의 사회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불편함 끝에, 몇 년 만에 염원하던 그곳에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끼는 희열과 만족감은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준다. 지난 여행의 아쉬움이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여행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제주가, 그래서 좋고, 그래서 온다.

3년 만에 드디어 이번 여행에 입성한 종달리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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