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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20년 봄, 제주

제주의 심야식당

제주는 시내가 아니면 늦게 뭔가를 할 수가 없다. 예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오던 곳들은 조금 덜 하지만, 그런 곳들도 11시 이후에는 문을 연 곳이 거의 없다. 최근 10년 동안 외지인들이 들어가 숙소를 연 작은 마을들은 해만 지면 칠흑 같이 어두워진다. 그럴 때면 책을 읽거나 같이 온 여행객들과 숙소에서 놀아야 했다. 10년 전만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작은 마을에 쉬러 온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곳을 좋아할 리도 없다. 그런 사람들 위해서 아주 조금씩 소소하고 혼술도 즐길 수 있는 곳들이 생기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마을 몇 군데 중 하나인 종달리에 있는 '종달리엔'은 3년 전부터 가려고 할 때마다 실패했던 곳이다.

알고 보니 주인장이 일 년에 절반만 문을 연다는 데, 그나마 문을 열 때는 사람들이 몰리고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데 뭔가를 기다려서 먹거나 가는 편이 아닌 난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다면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소소하게, 담담하게 한잔씩 홀짝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 긴 줄에서 기다리는 건 뭔가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최소한 내겐 그랬다.

3년 만에 입성한 종달리엔.

그런데 여행 첫날 확인해 보니 그 가게가 이번에도 내가 종달리에서 숙박하는 날엔 문을 닫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가야겠어'라고 마음먹고, 8시 반 타임에 자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몰아 종달리로 갔다.

3년 만에 들어간 종달리엔은 기대했던 만큼이나 아늑하고 소소했다. 혼자서 정갈한 안주를 친구 삼아 한잔씩 홀짝이다, 사장님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 어딘가에 혼자서 한 시간 반 동안 죽치고 앉아 있다 나와서 아쉬움이 그렇게 진하게 넘기는 처음이 아니었을까?

A: '내려와서 너무 좋아서 6개월 정도 놀다 보니까 더 놀면 안 되어서 자리 잡았죠 뭐'

B: '제가 매년 몇 번씩 내려오는데 5년째 못 가고 있는 가게가 있어요'

C: '혼자 오시는 분들 편하게 쉬다 가시라고 만든 공간인데 이게 참 쉽지 않네요'

이런 대화가 오가는 곳. 제주의 느림이 진하게 묻어나는 곳. 그렇게 낯선 사람들과 함께 편하게 자신의 제주와 인생을 남겨놓고 오는 곳. 내게 종달리엔은, 이 심야식당은 그런 의미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식당이 유명해지면서 오래 기다리게 만든다고 짜증내고, 진상을 부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상 있었고,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사장님이 작년 말부터 예약을 받고 뒤에 예약이 있으면 머무는 시간을 1시간 반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1시간 반이면 보통 한국사람 식사 시간보다 훨씬 길지 않냐고? 글쎄. 종달리 엔에 머물기엔 1시간 반도 짧다. 최소한 내겐 그랬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 중에 짜증이나 화를 낼 사람들은 그냥 버리면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또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쏟아붓고 가니 사장님 마음도 편하시진 않겠지. 그래서인지 2019년 12월에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영업을 하셨다는 사장님 말씀에 마음이 아파왔다.

이 가게가, 본래 사장님이 의도한 방법과 속도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들도 다름은 틀림이 아님을 인정하고 가게는 사장 마음대로 운영하는 것임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계속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더라도, 난 기쁘게 그럴 것이다.

소박한 종달리엔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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