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가 다 느린 것은 아니다.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제주에서 터전을 잡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서울보다 더 빠르고 치열하면 했지 덜하지 않다고 한다. 과외도,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한 경쟁도.
제주를 여행으로 오는 사람들은 '이 좋은 곳에서 왜 그럴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제주도의 땅값이 엄청나게 오른 것은 불과 지난 10년 간의 일이다. 어느 바닷가 동네는 모래가 너무 몰려와서 살 곳이 못된다는 이유로 집 10채가 다 합해서 5천만 원이었다고도 한다 (나도 들은 얘기라 그게 팩트라고 보장은 못하겠다. 지금의 제주를 생각하면 상상이 안되어서...).
밤바다를 밝히는 제주의 불빛은 제주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제주사람들이 치열하고 경쟁적인 것은 당연하다. 최소한 80년대, 어쩌면 9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을지도 모른다. 또 제주라는 곳 자체가 21세기 이전에는 육지에서의 정치로 인해 계속해서 피해를 봤던 곳 아닌가? 그런 아픔들 속에서 제주사람들은 거의 항상 자녀들을 육지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네들 삶이 어떻게 치열하지 않고 경쟁적이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제주의 느림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제주에서는 어디에서나 4-5시면 문을 닫는 가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처음부터 '장사를 할 만큼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이 없어서, 어차피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게에 올 사람이 없어서 그런 문화가 정착된 것은 아닐까?
그러한 그들의 삶의 터전에 여유를 누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넘치는 것이 사실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제주는 '느림'이다. 육지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며, 누릴 수 있는 여유이자 사치다.
내게 제주가 느림일 수 있는 것은 내가 '육지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의 북쪽과 남쪽은 이미 충분히 빠르다. 하지만 최소한 제주의 동쪽과 서쪽은 느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지난 10년간 제주로 몰려들어온 사람들이 육지의 빠름을 피해 이 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느리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도시의 치열함에 지친 사람들이 제주의 동쪽과 서쪽의 작은 마을들에 정착하고, 그들이 그 느림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그 느림과 인위적이든 자의적이든 존재했던 제주의 느림이 결합되어 제주의 느림을 완성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느림들을 최근에는 다른 요소들이 파고들고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바닷가가 3-4층 건물들로 북적이고, 모래바닥이었던 곳이 주차장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서 뿌리를 내린 '느림의 후손'들 역시 조금씩, 조금씩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물론, 빠름은 빠르기 때문에 느림을 잡아먹는 속도는 빠를 것이다. 하지만 뿌리를 내린 느림의 영역이 무너지진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느림의 흔적이 조금씩, 조금씩 뿌리내리고 확장되어가는 것을 올 때마다 확인하기에.
치열한 제주의 바다, 그 안에서 느림과 느림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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