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 혹은 개독/기독교인에 대하여

기독교인과 명예

예: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

'명예'에 대한 이러한 사전적 정의다. 이 정의는 '명예'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명예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서 온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독교인에게 명예는 직접 추구하거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세상의 가치에 따르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명예롭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나? 그건 아니다. 기독교인은 명예를 '추구'하거나 그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되지만 '명예로운 삶'은 살아야 한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결정이나 행위를 할 때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받기 위해서 해서는 안되지만, 기독교인의 모든 행동은 세상에서도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단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난 사람'의 삶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남이 내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내 욕심을 추구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항상 이웃에게 나눌 뿐 아니라 자신의 지위에 취하지 않고 겸손하다면, 그 사람에게는 명예가 당연히 따라오지 않을까? 그런데 성경에 있는 많은 말씀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고 기독교인이 그런 삶을 추구해야 한단 것일 뿐 모든 영역에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성경은 인간의 힘으로는 그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고,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결정을 반복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른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사실 타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넘어져도 이른번씩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만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 그 말씀의 의미가 아닐까?

이렇듯 기독교인은 명예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고 명예롭게 여긴다 해도 그로 인해 일희일비해서도 안되고, 그로 인해 오만해져서도 안된다. 이는 자신이 명예롭게 여겨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선하거나 착해서, 능력이 있어서가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누구나 무너지고 스스로 높아진다. 성경은 그런 인간관을 전제하고 있고, 우린 수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과 목회자들이 그렇게 세상의 명예 앞에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지 않나? 껍데기는 기독교인 또는 목회자이지만 그 하는 행위는 가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처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마저도 자신에게 명예가 주어지면, 어느 순간서부턴가 서서히, 그렇게 무너져 간다. 기독교인이 명예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한국교회에선 명예를 추구하라고 한다. 높아지고, 유명해져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말하라고 한다.

그런 요구와 말들은 많은 경우 '은혜' '교회' '비전' '소명'으로 포장된 자기 욕심에 불과하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에 그렇게 인정할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야 하며 자신이 이루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신 일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어느 순간엔가 명예에 취하고, 자신이 그것을 이룬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하나님을 껍데기로 이용해서 자신을 높이게 된다.

이는 명예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뤄지는 수단이며, 성경적인 삶을 산 결과일 수는 있어도 목표는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단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