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서의 결혼
이동 중에 인스타 피드를 보다가 어느 기독교 출판사의 포스팅을 봤다.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교회 친구가 있다는데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요'가 그 요지였던 것 같다. 속으로 '무슨 이런 걸 기독교 출판사에서 다뤄?'라는 생각을 했고,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그 내용이 뭔지는 모른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더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느끼지 않았기에.
그런데 그 포스트가 몇 일째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뒤에 무슨 내용이 있었을까? 검색을 해보니 그건 어쩌면 '비혼 주의자 마리아'라는 책에 대한 광고였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런데 '기독교 비혼'을 치면 나오는 글, 영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주 솔직히는 '우리나라 교회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내가 예전에 다녔던 교회들에서는 목사님들이 대놓고 '이 안에서 만나면 좋겠다'는 말을 예배 광고 시간에 하는 게 전혀 낯설거나 이상하게 여기지지 않았을 정도이니까. 같은 교회 안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걸 고려해서 같은 교단 안에서 다른 교회와 집단 소개팅을 하는 경우도 있더라.
비혼과 결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데 여기에서 우린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결혼을 하셨는가? 바울은 결혼을 했는가?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으셨고, 바울의 경우 유대인 사회에서 그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그가 회심하기 전에는 결혼을 했다가 회심 후 고향에서 3년을 보낼 때 회심으로 인해 이혼을 했거나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어쨌든 바울은 회심 후엔 비혼 혹은 싱글로 살았고, 심지어 가능하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것도 교회 다니는 사람과 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한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가정을 꾸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만약 그게 기독교의 교리이고, 율법이고,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라면 예수님이 오신 후 그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형성된 기독교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있던 유대교와 얼마나 다른가?
지금도 그 표현을 떠올리면 솔직히 조금은 당혹스럽단 생각이 드는데 '독신의 은사'라는 말은 결혼 자체가 얼마나 한국교회에서 우상화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독신도, 결혼도 은사로 하는 것이란 말인가? 성경 어디에 그런 은사가 나와 있나? 장담컨대 독신의 은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혼을 위한 결혼에, 마치 기독교인이라면 일단 결혼은 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뿐이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가정을 꾸릴 수 있냐?'라고 묻는다면, 난 '내가 하나님 얘기하는 것을 그 사람이 불편해하지 않고 다름을 틀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신뢰할만하며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답하겠다.
기독교인의 핵심은 어떤 '행위'와 '결정'을 했는지에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와 결정을 하게 된 유인에 있다. 상대를 사랑해서, 이 땅에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확산하기 위해, 내가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닮기 위해, 본인이 그런 것들을 위해 어떤 행위와 결정을 했다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고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난 믿는다.
따라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 해도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바울이 '가능하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은, 가정을 꾸리게 되면 발생하는 많은 문제와 갈등들이 개인이 하나님'만'을 보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7장 8-9절) 실제로 그렇지 않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면 우린 나 혼자가 아니라 배우자도 챙겨야 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삶도 책임져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우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우선순위에서 위에 올리게 될 수 있다. 바울은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혼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이다.
즉, 기독교인은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그 이유는 '내가 혼자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집중하기 위해서'여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가능하다면'이라고 했을까? 그건 바울이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세상 가운데에 나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전제하고 있는 인간상은 연약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은 거친 세상 속에서 혼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낼 힘이 없는 존재다. 바울이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알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인간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인간은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공동체를 꾸려서 살아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 바라보고, 의사결정의 기준을 성경과 예수님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결혼하지 않고 살 수 있으셨던 것은 그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고, 바울이 회심 후 혼자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완전히 하나님께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따라서 기독교에서 비혼과 결혼, 그리고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정답이 없다. 그 영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로 맡겨주신 영역이다. 만약 본인이 혼자 사는 것이 가장 하나님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선택하면 그 사람은 혼자 살기로 결정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까지 강인한 사람은 현실에 그렇게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상대의 종교와 관련해서는 내가 그 사람과 함께 해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게 될지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놀랍게도 상대가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을 더 보게 되고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상대에게 쉽게 물들어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살면서 본인이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상대와 나누고, 같이 고민할 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상대가 교회를 다닌다'는 안도감에 빠져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냥 안주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축복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두 경우 모두.
기독교에서 결혼을 할지, 누구와 할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정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과 가정을 꾸려도 나는 하나님을 잘 볼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대가 있는 경우에는 상대와 함께 할 때 내가 상대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상대의 존재로 인해 하나님을 더 보게 되는지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최악의 결정은 이러한 고민 없이 나이가 되었으니까, 상대가 교회를 다니고 그저 이 사람과 헤어지면 결혼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결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면서 '저 사람을 내가 교회 나가게 만들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교회에 나가게 하는 것,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상대가 하나님을 믿고 알게 되는 것은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꾸릴 때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여야지, 상대를 나에 맞춰서 바꾸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최소한 기독교인이라면 그래야 한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가정을 꾸린다면 상대가 평생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은 지키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하면서, 그를 위해 평생 기도겠다는 마음으로 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상대가 교회를 나가는 게 중요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게 중요한가? 전자를 위해서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두 사람의 관계를 망칠 수 있고 후자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고 '교회 다니는 스펙'을 보고 안심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이는 본인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상대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 지를 평가하고, 반드시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그런 평가와 스펙 놀이를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을 테니.
가정이 사역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가정은 일종의 사역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같이 교회를 다녀도 나를 통해 상대가, 상대를 통해 내가 하나님을 더 알아가야 한다면 그건 결국 사역이 아닌가? 그래서 결혼을 할 것인지, 그리고 누구와 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기준은 '그 결정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더 알고 더 가까워질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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