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들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남편이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고, 이 공동체에 있는 아이들에게 삼촌과 이모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해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는 요지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내가 과거에 알았던, 매우 가까웠던 친구 부부가 몇 년 전에 한 인터뷰였다. 결혼한 이후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연락이 안 되었는데, 그냥 잘 살고 있으려니 하다가 그 친구가 생각이 나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기사였다.
처음 그 기사를 보고는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을 갖고 넘어갔다. 물론, 당연히,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남편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라는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인터뷰 기사였다면 그냥 넘겨졌을 텐데, 자신들이 교회 생활하는 것에 대한 인터뷰에 그 내용이 있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 문제는 사실 모든 교회 다니는 부부에게 중요한 문제다. 아니, 사실은 사회적으로도 이는 큰 이슈이지만 교회의 경우 애를 낳아야 이 땅에 기독교인이 늘어난다는 식의 전근대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이 주제는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는 또 다른 이슈일 수밖에 없다.
우선 그 전근대적인 주장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그 주장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정말 그러한가?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경적 가치에 따라서 살아가나? 아니라면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들이 그렇게 성경적인 삶을 살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 주위에서는 목회자의 아들 또는 딸인 사람들 중에서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애를 많이 낳는다고 이 땅에 기독교인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교회에 다니기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전근대적인, 우리나라 교회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빠져있는 통계를 우상으로 삼는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
아이가 싫을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이를 가지면 들어가게 되는 돈이 적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그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고 자유도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가 없는 내가 인스타나 페북에서 아이를 가진 형, 친구, 동생들만 보더라도 그들은 너무나도 정신이 없어 보이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충분히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면 달라야 하냐고? 이 매거진에서 이전 글에서도 설명했듯이 기독교에서 '현상'과 '현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상과 현실을 야기하는 '결정'을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갖고 내렸는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정답 혹은 결론을 율법주의적으로 내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은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내는 삶을 사는 것'이어야 한단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든 결정은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서 이 땅에서 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에서 성경적 질서를 세울 수 있는 지를 기준으로 내려져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지금 교회에서 조카처럼 대하는 지인들의 아이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건 성경적이지 않다. 이는 그 결정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누가 보더라도 '나'가 기준이다. 그리고 '나'가 기준인 결정의 기준은 ‘나의 편안함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아이를 갖지 않을 수 있는 '성경적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그건 '아이를 양육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이 땅에 하나님의 질서를 특정 영역에 세우는데 집중시키고 싶어서'일 것이다. 만약 본인이 정말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 있다면, 그 영역이 있어서 거기에 모든 것을 쏟고 싶어서, 부부가 같은 소명을 갖고 함께 쏟아붓고 싶어서라면 아이를 갖지 않는 게 더 성경적일 수 있다.
사실 바울이 '결혼하지 말라'라고 한 것도 그것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 바울이 비혼을 정당화했다, 아니다는 식의 주장을 사람들이 본인들 입맛에 맞게 하는데,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결혼한 것이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결혼하지 않을 것을 권한다. 하지만, 만약 본인의 정욕을 이겨낼 자신이 없고 혼자 있는 게 성경적으로 살지 못하게 할 것 같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에 있는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그리고 바울과 같은 예외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의 평범한 사람은 보통 후자에 속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교회에 다니면서 실제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성경적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의 숫자보다 교회와 목회자를 우상으로 삼고 이생의 복을 쫓으며 샤머니즘적인 방식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사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될만한 이유를 가진 부부는 현실적으로 많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한 소명을 주는 사람은, 그것도 부부에게 그렇게 주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왜 아이를 가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아이를 갖는 것이 더 유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아기를 갖고 양육하는 과정은 철저히 나를 내려놓고 버리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육아를 하면서 '나는 어디로 간 거지?'라면서 우울해하지만, 그 과정을 견디면서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는 과정이 성경적으로는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정말 힘들 때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는 내가 낳은 나의 아이를 위해 나를 죽이면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본인의 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낸다는 것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면서야 비로소 인간은 '나보다 다른 존재를 우선시하는' 삶의 자세와 사랑하는 방법을 훈련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성경적인 삶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그럼 아이가 부모의 경건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 사용하는 도구냐?'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건 해석을 달리해야 한다. 아이는 그 과정에서 '경건과 훈련의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고, 여기에서 아기를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가 나온다. 그건 아기를 '사랑으로만 양육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브런치에서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을 2년 9개월이 넘게 쓰고 있지만, 쓰면 쓸수록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힘든 존재인지 만을 더 깨닫는다. 그런데 상대가 면역력도 약하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아기라면, 그 아기는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 아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기를 사랑으로 양육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 아기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며,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힌다는 면에서 부모에게도 유익하고 좋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사랑으로, 성경적으로 아기를 양육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산하는 과정이 된다. 이는 그 과정에서 부모도 성화되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됨으로써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직접 쓰일 뿐 아니라 그 아이들이 사랑과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되었을 때 그 아이들이 가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가 핵심이다
아이를 갖고, 양육하는 과정은 힘들다. 나도 아기를 가져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힘들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게 안다. 그 '힘듦'은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이상일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물리적으로 '결혼'한 사람들은 크게 부러워하지 않지만 아이까지 가진 사람들을 '엄청나게 많이'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은 나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을 머리와 마음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를 갖고, 양육하면서 가정을 꾸려보지 않는 이상 난 절대로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아이를 갖고 양육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그렇게 보내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각오를 갖고, 그러하기 위해서 아기를 갖기로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더 알아가거나, 아기를 갖지 않거나 결혼하지 못하거나 안 했다면, 아기를 양육하는 데 사용할 만큼의 에너지를 특정 영역에 쏟아부어서 그 영역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사실 그래서 난 아직도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갖는 소망함을 갖고 있다. 이젠 프리랜서의 길을 가기로 했으니 내가 육아도 조금 더 할 수 있을 테니 더더군다나. 누군가는 이렇게 소망함을 가져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듯한 삶을 사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자신의 발로 차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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