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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혹은 개독/일반적인 신앙에 대하여

한국교회와 ‘먼저 된 자 나중 되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태복음 20:16)

모태신앙의 한계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인 내게 가장 불편한 말씀이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내가 선택할 수도 없었던 부모가 내가 태어날 때 교회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난 나중 될 수밖에 없단 말인가? 먼저 되었었다고 해서 꼭 나중 되라는 법은, 그리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란 법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가끔 접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말씀이었다. 그런데 총회에서 김하나 목사가 2021년에는 위임목사로 명성교회로 부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을 보고, 이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말씀이 갖고 있는 의미가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어머니 배 안에 아이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그 부모나 부모 중 한 사람이 교회에 다녀서 유아세례를 받고 계속 교회에 다닌 사람들을 '모태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표현이 참 잘못된 것이, 그렇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는커녕 교회에도 나가지 않게 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아니, 어렸을 때부터 교회 안에서 성장하다가 교회에서 말하는 교리들 중에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나 목회자들의 이중성, 교회 안에서의 정치를 보고 교회를 떠나게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모태신앙인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가끔씩 자조적으로 '모태신앙이 아니라 못해 신앙이다'라고 말하는 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 중 상당수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습관이고, 관행이다 보니 별다른 감동 없이 그냥 교회에 다닌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다. 그들 중에 교회에 머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마치 본인이 성경을 다 이해하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 다 이해하고 믿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기도 한다. 

'세뇌'된 교회 다니는 사람들

그런 상태는 '세뇌'된 상태가 아닐까? 그리고 사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일방적으로 주입되어 온 내용을,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믿음 없음이라고 판단받으면서 성장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보니 인간이 만든 교회와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그에 대한 혼란이 오고 본인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때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이단에 넘어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일까? 많은 모태신앙, 혹은 신앙을 가진 지 오래된 사람들은 자신이 처음 접했고, 계속 접해온 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서 멀리서 그들을 보면 하나님, 예수님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그들이 처음 접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모태신앙인 사람들의 경우 많은 경우에 그 신앙이 유치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다

그렇게 정체되어 있는 그들의 믿음과 신앙은 세상 풍파를 겪고, 세상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한 이후 복음을 전해 들은 이들에게 뒤처지게 되어 있다.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세뇌되지 않은 이들이 신앙을,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많이 고민하고, 읽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세상과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 간에 연결고리들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신앙이 견고해진다. 여기에 더해서 본인이 믿음을 늦게 가졌기 때문에 잘 모른다는 생각에 더 많이 공부하고, 고민하고, 기도한다. 

그렇게,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되기 시작한다. 그것도 꽤나 빠른 속도로. 왜냐고? 그건 기존에 교회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살면서 아무 고민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신앙이 그만큼 어리고 작으면서 유치하기 때문이다. 

나중 된 자 된 목회자들

그리고 그 끝에는 목회자들이 있다. 우리나라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교를 가고, 그 신학대학교 출신들을 실질적으로 우대하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전도사 또는 강도사로 몇 년을 교회에서 일하고 시험을 몇 번 보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학부만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 마찬가지 경로를 통해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 중 상당수, 어쩌면 대부분은 세상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저 성경책 속에 있는 분일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모험을, 하나님께 믿고 맡기고 하는 모험에 대해서 모른다. 지식으로만, 기도로만, 자신들이 상상하고 경험한 범주 내에서만 하나님을 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교회 안'에 갇혀 있다. 목회자들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과 달리 세상 풍파를 겪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온몸으로 겪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이후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계산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할 줄 알며, 그들은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고, 교회가 세상보다는 낫기 위해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하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 지를 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아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세상보다 못한 교회

이번 명성교회에 대한 결정은, 먼저 되었다고 착각하는 목회자들이 한 나중 된 결정이다. 철저히 형식논리로 일단 세습에 대한 교회 헌법의 내용을 준수 또는 회피하고, 실질적으로 김하나 목사가 세습을 할 수 있게 해 준. 그런 결정은 세상에서 법원에서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교회'를 말하면서 그런 얄팍한 술수를 쓰는 그들이 목회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현실'을 생각했을 것이다. 명성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이 얼마 인대? 만약 명성교회가 교단을 떠나면 교단 예산은 어떻게 할 건가? 어쨌든 곧바로 세습은 아니니까 법은 지킨 거 아니야? 이걸 오래 끌어봤자 좋지 않아. 등...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말 교회 틀 안에서만 갇혀 있는 자들이 내린 결정이다. 그것도 76%가 찬성을 하다니...

만인제사장설을 기초하고 있는, 인간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원리의 시작점이 된 종교개혁을 통해 만들어진 개신교 교회에서 왜 목회자들만 투표를 해야 하는 걸까? 그들은 심지어 선출된 자들도 아닌데, 그들은 교단 안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현실적인' 고려를 해서. 그들이 믿는 절대자는 세상의 돈, 권력에 구속된 자들이고 전지전능 하시진 않은 듯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울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그렇게 현실을 고려해서 결정을 했나? 그런 현실과 타협이 있었다면 초대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안다. 76%가 아닌 24%의 목회자가 있단 것을. 그리고 한 교단이 이 땅의 모든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단 것도. 그리고 이런 비판이 '목회자 전부'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도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는 것도 안다. 좋은 목사님들도, 이번 결정에 분노하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시는 목회자들이 많다는 것도. 하지만 76%라는 숫자가 이 땅의 교회들이 얼마나 세상보다도 못한 지를 보여주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 지점이 아프고, 슬프고, 힘들다. 

먼저 된 자는 나중 될 수밖에 없다. 먼저 된 자가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상. 지금 한국교회는,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도 나중 된 자들이 되고 말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이 땅의 희망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짐일지도 모른다. 

ps.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비판해도 되냐고 묻는다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장사치로 가득 찬 성전 안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돌아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의한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셨으며, 그러한 문화를 뒤집으로 오신 혁명가셨다. 좋은 게 좋고, 착하기만 한 것이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비난이 아닌 비판은 항상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