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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혹은 개독/일반적인 신앙에 대하여

기독교에 더 이상 기적이 필요 없는 이유

초자연적인 일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내겐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있던 즈음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대립도, 나의 소망함도, 바보 같은 것임을 이제는 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런 것이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끝난건지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우리 기준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일으키실 수도 있고, 일으키지 않으실 수도 있는 분이다. 전지전능하시니까. 그리고 인간은 그 [필요한 때]를 분별하는 능력이 없다. 즉, 그냥 하나님께 달린 일이다.

그게 끊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해석의 해석을 통해서 그런 주장을 하는데, 그렇게 돌아돌아가야 하는게 진리인 경우는 거의 없더라.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일을 엄청나고 대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초자연적인 것은 하나님께 별 일도 아니다. 200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로 와서 우리 삶을 보면, 이게 말이 되는 세상이겠나? 90년대 초에 누군가가 화상회의가 이렇게 일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헛소리를 한다고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일도,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끊고 말고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런 나의 소망함은 왜 바보 같은 일일까? 이는 사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중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떠져서 '이러니까 이러저러하게 된거지 뭐'라고 쉽게 말하는데, 그 인과관계가 연이어 일어날 가능성을 하나, 하나 따져보면, 그런 인과관계가 이어져서 일어난 일들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적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종의 기적이다.

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이란 뭔가 엄청나게 초자연적인, 예를 들면 사람이 1층에서 63빌딩 꼭대기까지 날아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그런데 여기에서 한번 묻자. 누군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믿게 되나? 당장 눈에 있는 뻔한 상황에 대해서도 확증편향이 있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렇게 날아가면, 사람들은 분명 기계를 차고 한 것이라거나 착시효과라고 할 것이다.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그런 논란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논란의 중심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 기적 없이는 하나님께서 본인이 하나님 되심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하신 수단 말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내기 전에 파라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수 차례 보여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 이집트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그런 것을 보여주신 것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 세상을 떠난지 한참이 지난 시점에서 그런 식의 일을 보여주지 않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확신을 주기 위해 하신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집트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나?

구약이 서술하고 있는 시대에는 그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에 지금의 성경이 있을리도 없고, 일부 책은 쓰여졌다 하더라도 당시 인쇄술을 감안하면 성경을 읽거나 접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특권층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는 사실 신약이 쓰여진 시대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도 몇몇 종교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말씀을 직접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접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등 다양한 계파가 대립한 것은 얼마나 복음이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시기에는 초자연적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그런 기적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그걸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석하려 들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기적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 너무 쉽게, 아무렇게나 대하는 성경이 우리 손에 오게 된 과정을 돌아보자. 그 수많은, 다른 시대에 쓰인 문세들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거기에서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어떤 문서를 정경으로 인정하니 마니 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손에 오게 되었나? 그 과정이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우연이었다면, 왜 성경만 유독 그렇게 많이, 널리 번역되었을까? 사실 그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그 문제는 개인의 견해에 따라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 중요한 건,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기독교인 자신이, 개인이, 교회가 복음이 되어서, 말씀이 되어서, 복음을 살아내는 주체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기적과 같은 결정을 내리고, 그런 삶의 방식을 살아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심을, 예수님은 예수님 되심을 살아내야 하는 시대를 산다는 것이다. 즉, 우리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우리 삶이 기적이 되어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 삶이 기적이 된단 것은, 세상 사람들의 상식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기적을 바라기보다 우리 삶이 기적이 될 수 있는 결정을 하며 살아갈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와 방향성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과정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게, 모든 기독교인이 갖는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