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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13년 봄,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 유랑기_개요

사람이 800km를 걷는다고?

내 주위에는 산티아고 가는 길, 또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았다. 사실 난 그게 무슨 길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회계사를 그만두고 3-4개월 정도 배낭여행을 떠난 친구가 까미노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도 내 반응은 '미친놈'이었다. 왜 사서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자동차도, 자전거도 있는데 왜 굳이 800km를 걸어서 걷는단 말인가? 그 길이 무슨 의미가 있겠다고...

사실 그 길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접하고 나서 그 길에 대한 내 거부감은 더 커졌다. 천주교 신자들이 걸어온 순례의 길.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에서 빛이 나서 그 위에 성당을 지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산티아고의 성당. 그리고 그 성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순례길이라니... 개신교 신자인 내 입장에서는 '성지'라는 개념이 와 닿지도 않았고, 그런 개념은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으며, 일부로 그런 고행의 길을 가는 게 받아들여지지도, 이해되지도 않았다. 높은뜻 숭의교회 목사님이셨던 김동호 목사님께서 까미노를 이틀 걷고 나서 그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신 것과 마찬가지 생각을 나는 까미노에 들어서기 전에 갖고 있었다.

'20km 걸으니 허전해' -까미노 막판에 60대 할아버지

까미노에 발을 내딛다

그랬던 내가 까미노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은 2013년 3월에 할게 아무것도 없었던 영향이 가장 컸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나의 첫 변호사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취업은 되지 않은 상태. 내 로스쿨 동기들 중 미리 취업이 된 친구들은 시험 직후 일을 시작했지만 난 1-2개월 정도 몸을 추스른 이후에는 할 게 없어서 빈둥대고 있었고, 마침 까미노를 예전에 걸었던 그 회계사 친구와 밥을 먹던 중에 그 친구가 '까미노나 갔다 와'라고 말을 던진 게 내가 길을 꺼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까미노를 선택한 것은 회피의 수단이었다. 사실 난 합격률이 무려 86%에 육박한다는 제2회 변호사시험을 떨어질 것이란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스쿨 3학년 2학기 내내 고민을 하느라고 변호사시험 준비를 제대로 안 했으니까. 고민이 많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로스쿨에 진학한 것은 돈을 더 벌기 위함도, 더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함도 아니었기에 막상 졸업을 앞둔 시점이 되니 생각이 엄청나게 많아졌었다. 대형 로펌, 중형 로펌, 작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을 모두 해봐서 변호사의 삶이 어떤지를 알고, 변호사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아는 상황에서 내 마음과 머리에서는 '내가 그렇게 살려고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닌데...'라는 회의감을 나를 가득 채웠다.

그러던 와중에 지금은 내 지도교수님이신 교수님께서 11월에 이제는 나의 박사 전공이 된 전공의 주제로 학술대회가 있는데 주제 발표를 해보지 않겠냐고 하셨고, 나는 변호사시험보다 그 발표 준비에 더 빠져서 2012년 하반기를 보냈다. 1월 초-중순에 변호사시험을 앞두고 그러고 있었으니, 변호사시험 준비가 제대로 됐을 리가 없지 않나?

떨어지면 얼마나 힘들지도 알고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힘드실지를 알았기 때문에 부인하고 싶었지만 사실 난 이미 시험 결과를 무의식 중에 알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4월 중하순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고 혹시 모르니까 취업자리를 알아볼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비용 때문에 망설이는 내게 그 회계사 친구가 '그래, 너처럼 보수적인 애는 절대로 까미노에 가지 못하지. 뭐 그냥 그렇게 살아'라는 말 한마디에 난 충동적으로 파리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것도 회사 다닐 때부터 유지해오던 주택청약통장까지 깨 가면서 말이다.

후회도 했다. 이 발을 내딛는게 아니었다고 - 2013년 3월

까미노가 내게 준 선물들

그렇다. 난 다른 사람들처럼 까미노를 엄청나게 가고 싶어서 벼르고, 벼르다 간 것도 아니고 그 길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다. 아니, 난 오히려 그 길에 대한 반감이 컸고, 내가 위에서 설명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길로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준비되지 않은 순례자였다. 내 주위에는 지금도 그 길을 밟고 싶다고, 그게 본인의 버킷 리스트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2013년 3월에 유럽 30일 체류 조건으로 100만 원 정도의 가격에 파리를 왕복하는 비행기를 끊었을 때 내게 까미노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냉정하게 얘기하면 까미노는 '하이킹 길'로 따지면 특출 나게 매력이 있는 길은 아니다. 난 제주도에서도, 우리나라 산에서도 까미노에서 마주한 풍경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봤다. 그리고 까미노에서 만난 하이킹을 엄청 좋아한다는 한 한국 여자분은 길을 걷는 내내 '이 길이 왜 그렇게 유명한 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같이 걸을까'에서도 드러나지만, 사실 까미노의 길들은 때때로 차도를 옆에 두고 걸어야 하고, 지나가다가 들개와 마주치기도 하며, 돌산을 넘어야 할 때도 있다. 사실 단순히 하이킹 루트로 까미노를 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난, 추천하기보다는 말릴 것 같다. 그냥 우리나라 국토 횡단하는 게 경치는 더 예쁠지도 모르니까.

그런 길을, 그런 마음을 갖고 밟았지만 내 노트북 두 대의 배경화면은 2013년 4월 이후 지금까지 까미노에서 찍은 사진에서 바뀐 적이 없을 정도로 까미노가 내게 준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까미노에서 달고 온 가리비는 지금도 내 책상 위에 걸려있다. 첫 번째 변호사시험에서 떨어진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줬던 것은 까미노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었다.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죽고 싶었고,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지만 까미노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나눴던 대화들, 했던 생각들이 나를 지탱해줬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미사를 드리고, 수많은 성당들을 둘러보면서 종교에 대한 고민도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난 개신교 신자로 남기로 결심했다. 따라서 내게 까미노는 사실 그렇게 종교적인 의미를 갖진 않는다. 아니 사실 교리적으로, 종교적인 행위로써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내가 했던 생각, 느낀 감정,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이었으며 그때의 그것들은 내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내가 까미노를 떠난 지 5년 반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순례자 유랑기]를 주제로 그 길에서의 경험들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매거진에서 풀어낼 나의 이야기들이 어디에선가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텨내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의 까미노가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다 걷고 Santiago-꽤 오래 앉아있었던 카페에서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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