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도 중요하지만...
앞의 글에서 까미노에서 가방의 의미에 대해서 엄청나게 강조를 했지만, 사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과정에서 가방보다 조금 더 의미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딱 한 가지. 그건 '까미노' 말 그대로 길 그 자체다. 까미노는 스페인어로 길 또는 거리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실 '까미노'라고만 하면 그 단어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모를까 봐 글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설명을 굳이 하고 있지만 그 길을 걸은 사람들에게는 '까미노'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온 사람들이 '까미노'라고 하는 것은 그 길 자체를 의미하고, 사람들이 이 길을 부를 때 '까미노'라고 부르는 것은 이 길에서 길 그 자체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준다.
사실 어느 길이나 오래 걷다 보면 그 길이 인생 같다는 느낌은 들기 마련이다. 학부 1학년 때 혼자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했을 때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까. 어느 길이든지 며칠 이상 계속 걷다 보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고른 길과 고르지 않은 길, 아름다운 길과 먼지가 가득한 길을 만날 수밖에 없다. 우리네 인생에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날 수도 없고,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느낌 때문에 걷는 것을 좋아한다.
까미노에서만 볼 수 있는 순례자 표지판-2013년 4월
'까미노'를 특별하게 하는 것
그런데 까미노가 다른 길들과 다르고, 더 특별한 것은 그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인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른 길들과 달리 까미노는 '산티아고'라는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은 비슷한 곳에서 숙박을 한다. 마치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미래를 향해 매일을 살아가고, 그 과정에서 인생의 단계마다 유치원, 학교,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듯이 말이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 잘 어울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사실 내가 까미노에서 길 위에서 겪은 가장 다이내믹한 경험은 첫 날을 같이 걸었던 Bob이라는 할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 Bob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까미노를 찾았는데 그는 은퇴한 군인으로 체력에도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나는 죽음 직전까지 이른 반면 그는 내게 민트 초콜릿을 선물하고 먼저 앞서 갔었다. 그 이후에 Bob과 나는 악연(?)이 이어져서 우리는 계속 같은 길로 걸었는데 그는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과 같이 걷기를 원했고, 나는 혼자 걷고 싶었다. 이는 그 사람들의 페이스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어느 날 그 패턴을 깨기 위해서 40km를 걸어버렸고 그 뒤로 Bob을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산티아고에서 100km 지점인 사리아 즈음에 가서 쉬기 위해서 카페에 들어갔는데 Bob이 거기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일정 때문에 중간에 버스도 조금 탔는데 그가 어떻게 거기에 있었던 것일까? 그를 본 순간 사실 별의별 생각이 다 뇌리를 스쳐갔다. '이런 괴물 같은 할아버지, 내 몇 배를 걸은 건가? 이 사람 어떻게 여기에 있지?' 등의 생각들이.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걷다가 중간에 무릎이 나가면서 걸을 수 없게 되었고, 병원에 입원해서 며칠을 보낸 후에 버스를 타고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리아로 온 것이었다.
나보다 훨씬 건강하고 잘 걸을 것 같던 Bob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그렇지 않나? 더 뛰어난 것 같은 사람이 뒤처지기도 하고, 그 관계가 다시 역전이 되기도 하고. 예를 들면 내 고등학교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대학에 진학한 반면 난 재수를 해야 했고, 그 뒤에는 난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장에 들어간 반면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직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앞서가던 친구를 내가 앞지른 듯했지만, 그 뒤에 그 친구와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들로 인해 우리는 그 관계가 역전의 역전을 반복했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좌절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사실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우고 있다.
그 깨달음의 시작은 까미노에서의 경험이었다. Bob처럼 잘 걷던 사람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인해 까미노를 끝까지 걷지 못하기도 하고, 길 위에서 만난 한 누님은 매일 20km도 걷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길을 걷다 보니 결국 완주를 하더라. 속도보다, 지금 내가 있는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것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까미노다.
까미노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2013년 4월
까미노를 완성하는 것
위에서는 Bob의 얘기만 예로 들었지만 까미노 위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얼굴 처음 보는 사람들과 돈을 모아서 밥을 해먹기도 하고, 며칠 전에 같이 걸었던 사람을 한참 뒤에 다시 길 위에서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느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 같은 경우 한 알베르게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숙소)에서 몸이 너무 피곤한 상태로 잠이 들어서 코를 골자 어느 스위스 사람이 '아 XX 망할 한국 놈 때문에 잠을 못 자겠네!'라고 소리를 질러서 그 소리에 잠이 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스위스 사람이 거의 탱크가 지나가는 수준의 코를 고는 것도 경험했다. 다음날 같은 방에서 잔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내 코 고는 소리가 저 사람보다 더 컸냐고 물어보자 내 코 고는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들 하는 등의 경험도 했다.
까미노에서는 정말 너무나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나 같은 경우 3월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걷기도 했고, 들개를 만나기도 했으며,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걷기도 했지만 엄청나게 궂은 날씨 속에 걷기도 했다. 800km에 이르는 까미노는 그 지형이 굉장히 다른, 크게 4개 정도로 구분할 수 있는 지역을 관통해 가기 때문에 자연환경, 기후, 그 지방의 음식이 모두 다르고 그에 따라 길 위에서 걷는 느낌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환경의 변화에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만남, 그리고 알베르게에서의 조우가 결합해서 까미노에서는 까미노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완성된다.
까미노는 그런 길이다. 그냥 하이킹을 하기 위해 까미노를 가겠다고 누군가가 그런다면 난 차라리 지리산 산행을 가던지 올레길에서 예쁜 구간을 걸으라고 하겠다. 그것도 아니면 네팔로 트래킹을 가는 게 나을 것이다. 정말 길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다. 하지만 까미노는 까미노만 줄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그 길을 하이킹으로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여러 가지 사연을 갖고 그 길을 걷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눈 내린 까미노의 어느 날-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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