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가 매일 바뀌는 경험
사람들이 까미노를 생장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걷는데 평균적으로 30일이 조금 넘게 걸린다. 그래서 산티아고 가이드북도 그 정도 일정에 맞춰서 구간을 나눈다. 하지만 하루에 걸어야 할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파리 인, 파리 아웃으로 유럽에 30일간 체류하는 표를 사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길 위에서 25일밖에 보낼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일부 구간을 건너뛸 수밖에 없었는데 나와 같이 걷기 시작한 독일 아저씨 Stefan은 23일 만에 그 거리를 다 걸었다. 나 역시 생각보다 빨리 걸어서 산티아고에서 3일을 머무르면서 까미노에서의 시간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평균적으로 30일 정도 걸리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매일 잠자리가 바뀌어야만 하는 경험을 한다. 까미노 위에 있는 도시들 중에 4성, 5성급 호텔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묵는 거점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들이 존재하긴 한다. 그래서 조금 여유가 되고, 개인의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러한 호텔을 이용하면서 걷는다. 그런 숙소들의 부대시설은 숙소마다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숙소들은 시설이 좋지 않은 공립 알베르게(Albergue)보다는 무조건 시설이 좋단 것이다.
2013년에 이미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사립 알베르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금전적으로 빠듯한, 그리고 개인의 공간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립 알베르게에서 숙박하는 것이 보통이다. '알베르게'는 스페인어로 '여관'을 의미하는데, 사실 까미노 위에 있는 알베르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관의 느낌보다는 호스텔 또는 게스트하우스의 느낌이 강하다. 알베르게들에는 보통 2층 침대들이 놓여 있고 화장실, 세탁시설 등은 알베르게들마다 갖추고 있는 시설에 큰 차이가 있다. 내가 까미노를 걸었던 5년 전에는 알베르게들에 따라서 와이파이가 없는 곳도 있었으나, 그런 곳들도 당시에 대부분 와이파이 설치 작업을 하고 있었단 것을 감안하면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숙소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그 당시에 많은 공립 알베르게들은 시설을 보수하고 있었으니 이젠 전반적으로 시설들이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공립 알베르게들이 매우 저렴한 가격에 숙박을 제공하는 것은 산티아고를 찾던 순례자들을 마을에서 숙박할 수 있게 해주던 과거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례자들이 이 길을 약 2천 년 가까이 찾으면서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할 필요가 발생했고, 그들을 하나 둘씩 재워주던 것이 까미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지방자치단체나 국가에서 그 숙소들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공립 알베르게들은 대부분 시설이 엄청 좋지는 않았고, 내가 걸을 때 많은 알베르게들이 시설을 개선시키고 있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공립 알베르게들에 묵은 것은 가능하면 그 때 순례자들의 발자취를 거의 그대로 따라 가보고 싶었던 영향도 있었다.
아담했던 알베르게 밖으로 보이던 풍경 - 2013년 3월
알베르게
공립 알베르게들은 대부분 하루 숙박비용이 5유로에서 6유로였고 사립 알베르게들은 10유로를 넘는 곳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시설들은 차이가 매우, 매우 컸다. 최근에 지어서 매우 현대적인 숙소들도 있었고, 엄청나게 큰 규모로 만들어진 곳이 있었던 반면 다 쓰러져가는 나무 침대에서 잠을 취하거나 누군가가 몇십 일은 자고 난 듯한 침대 위에서 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곳들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호텔과 공립 알베르게 중간 정도가 되는 사립 알베르게들에 묵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설이 크고 화려한 알베르게일수록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적었단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숙소에 묵을수록 서로 통성명을 하고, 대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간 반면 주로 대도시에 있었던 큰 규모의 알베르게들에서는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고 혼자 도시를 거닐다 잠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사실 난 큰 규모의 좋은 시설의 알베르게보다 역사가 오래된, 그리고 사람들끼리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의 알베르게를 좋아했다.
칸막이 속에 개인 공간이 보장되던 거대한 공립 알베르게 - 2013년 3월
그런 알베르게에서는 많은 대화가 오갔다. 어디에서 왔는지, 왜 오게 되었는지와 같은 대화는 당연하고 깊은 대화가 이뤄질 때는 인생과 종교, 신에 대한 대화도 꽤나 빈번하게 이뤄졌던 기억이 있다. 사실 까미노에서 내겐 알베르게에서의 그 대화들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살아가고, 비슷한 것을 목표로 하는 듯한 한국과 달리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내가 상상도 못 한 방식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얘기들 중에 Polygamy처럼 거부감이 가는 것들도 있었으나, 지금 돌아보면 처음에는 날 그렇게 불편하게 했던 대화들이 오히려 다음날 길을 걸으면서 그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런 고민들이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까미노를 걸었던 3-4월은 아무래도 비수기다 보니 주요 거점이 아닌 지역들에서는 때때로 거대한 알베르게 전체를 나 혼자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알베르게 자체가 닫혀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민들에게 물어서 경찰을 찾아가면 경찰이 문을 열고 내가 묵을 수 있게 해 주더라. 난 지금도 4층짜리 알베르게에 관리인도 없이 나 혼자 묵던 날에 느끼던 뭔지 모를 두려움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알베르게는 3층 침대들이 있었는데, 사실 처음에는 누구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좋을 것 같았던 그곳에서 난 무서워서 내가 자는 방문을 잠그고 그 앞에 의자를 받쳐놓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이 들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걸까? -2013년 3월
숙소와 잠자리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나는 얼마나 화려하고 좋은 집과 잠자리를 갖는지 보다 어떤 사람과, 또는 사람들과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몇몇 알베르게들은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어떤 숙소보다도 여건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잠자리에서 편하게 잠들 수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건 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때때로 걱정으로 인해서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는데 까미노에서는 그런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매일 걷고, 생각하고, 먹는 게 전부인 심플한 생활을 하다 보니 내 몸은 저절로 좋아지고, 잠도 잘 자게 되더라.
이와 관련하여 내가 까미노에서 만난, 몇 년 전에 까미노를 처음 걷고 나서 까미노에 정착해 버린 한 한국 여자분은 굉장히 놀라운 얘기를 해줬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고 예민한 편이어서 외출하기 전에 문과 창문이 잠겼는지, 그리고 물건들이 제대로 있는 지를 확인하는데 항상 1시간 반 정도를 써야 하는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그녀는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코까지 골아가면서 열악한 알베르게들에서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 가장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고, 그녀는 그래서 한국을 떠나 산티아고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까미노에 와보니 사실은 자신이 그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을 휘어감은 긴장감들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었다고 했다.
잠자리와 숙소, 집. 물론 그런 환경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내가 걸으면서 느꼈던 것은 그런 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단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숙소, 집과 그런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알베르게, 또는 숙소를 통해서 난 그 길 위에서 또 사람을 생각했다. 혼자 걷다가 묵게 된 알베르게에 단체로 걷는 스페인 사람들이 몰려들면 침대 위에서 느껴지던 그 긴장감과 소외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까미노에서 알베르게는, 숙소는 이렇듯 단순히 잠드는 곳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으로 '같이 걸을까'가 참 좋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이는 알베르게에서의 모습들이 그려질 수가 없단 것은 까미노 상에서의 생활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대화를 많이 나눴던 Samos의 수도원 안에 있던 공립 알베르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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