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와 다이어트
박사들을 채용하는 기관은 많지 않고 내 전공이 특이하다 보니 곧바로 취업이 되지는 않을 터라 '이번에 졸업할 수 있게 되면 까미노나 다시 갔다 올까?'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했을 때 난 어머니께서 '재정신이니?'라고 반응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머니는 '그럴래?'라고 하셨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확했다. 내가 까미노를 걷고 와서 살이 많이 빠져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스트레스를 극단적으로는 잘 받지 않는 편이고, 일정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다 보니 살이 잘 붙는 편이다. 거기다 공부하는 게 업이고, 그 전에도 홍보실에서 항상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보니 마음먹고 식단을 조절하지 않으면 난 항상 살집이 있는 편이었다. 운동이야 꾸준히, 다양하게 하지만 먹는 것을 조절하지 않으면 살이 빠지지 않더라.
하지만 까미노를 걷는 동안은 그런 걱정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일단 하루 최소한 4-5시간은 걷다 보니 운동량이 많기도 했고, 마을을 지날 때가 아니면 음식을 살 수가 없는데 중간에 뭔가를 먹으려면 가방에 넣어가야 하다 보니 가방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음식은 잘 사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한 손에 2L짜리 물을 들고 걸었는데 거기다 음식까지 어떻게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살이 빠졌다. 내 지인은 오히려 살이 쪄서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끼니를 거르거나 불규칙하게 먹다가 하루 세 끼를 다 챙겨 먹으니 살이 붙었다더라. 하지만 내 경우에는 아무래도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끼니를 최대한 간단하게 해결하려다 보니 살이 찔만한 것은 잘 먹지 않게 되더라. 난 '같이 걸을까'에 나오는 식당들에서는 한두 번 정도밖에 먹은 적이 없을 정도로 끼니에 쓰는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걸었다. 그렇게 한 달을 걷고 와서 내 얼굴을 처음 본 지인들은 모두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며 놀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빠졌던 살은 관리를 하지 않으니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대로 회복(?)되더라.
분명히 빵빵했던 잠바가 어느새 헐렁해지기 시작했다 - 2013년 4월
빵, 또르띠아, 카페 꼰 레체
까미노를 걸으면서 가장 많이 먹었던, 그리고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음식을 대라면 그건 또르띠아 (Tortila)다. 이 또르띠아는 Taco 나 Burrito를 만들 때 사용하는 밀가루 전병이 아니라 일종의 오믈렛으로 작은 마을에서도 감자가 들어간 또르띠아를 빵 사이에 끼운 샌드위치를 비싸지 않게 팔기 때문에 까미노 위에서 엄청나게 자주 먹은 음식이다. 내가 걸었던 3-4월에는 눈보라도 휘몰아쳤다 보니 열심히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서 또르띠아에 cafe con leche (카페 라테)를 한 잔 마셔주면 온 몸이 녹으면서 나른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스페인어로 우유가 들어간 커피, 즉 카페 라테를 의미하는 cafe con leche는 우유의 맛 차이 때문인지 한국에서 마셨던 카페라테보다 훨씬 고소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떠나기 전에 까미노를 걷고 온 친구가 cafe con leche는 꼭 마시라고 할 때 '라테가 다 라테지...'라고 생각하며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만 머시던 난 친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몸을 녹이기 위해 cafe con leche를 한 번 마신 이후 난 카페에 들어갈 때마다 cafe con leche를 시켜 마셨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그 맛을 잊지 못해서 커피가 맛있다는 가게들을 많이 찾아다녀봤지만 난 아직도 까미노 위에서 마셨던 cafe con leche만큼 고소한 라테를 거의 마셔보지 못했다. 또르띠아의 경우 몇몇 가게에서 본 적은 있으나, 까미노 위에서 사 먹었던 저렴한 또르띠아가 한국에서는 가격대가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차마 사 먹지는 못하겠더라. 그래서 난 까미노를 5년 전에 걸은 이후 지금까지도 간간히 또르띠아와 cafe con leche를 그리워한다
거의 주식이었던 또르띠아와 cafe con leche- 2013년 3월
그 외 음식들
사실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빠에야와 하몽 정도다. 회사에 다닐 때 스페인으로 휴가를 갔을 때 경험으로 '스페인 정통 음식'이라고 할 만한 음식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사실 까미노 위에서 음식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식사는 보통 전날 사놓은 과일이나 빵 등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그날 걷는 일정을 봐서 점심 먹을 만한 마을이 있으면 그 마을에 도착해서 해결했다. 점심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을 경우에는 바게트와 그 안에 넣을 것들을 최소한으로 가방에 넣고 가다 중간에 들판이나 정류장에서 먹곤 했고, 저녁에는 가능하면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에서 슈퍼를 찾아서 직접 간단한 것을 해 먹는 것이 싸게 먹혔다. 아주 가끔씩 알베르게에 함께 묵는 사람들과 저녁을 코스로 먹기도 했지만, 그렇게 끼니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재료를 사서 뭐라도 해서 차려 먹는 게 싸고 풍성했기에 난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주로 그 안에 머물렀다.
그렇게 돈을 아끼면서도 까미노를 먼저 걸은 친구가 꼭 먹어보라고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문어숙회인 뿔뽀. 사실 Pulpo가 스페인어로 문어이기에 '뿔뽀'라는 것인 결국 문어요리를 꼭 먹어보라는 것을 의미한다. 까미노 위에서는 Melide라는 마을이 문어요리가 맛있기로 유명한데, '문어가 별 것 있겠어'라며 작은 양을 시켰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한 기억이 있다. 재미있는 건 그 맛이 그리워서 다음 마을에서 또 뿔뽀를 시켜먹었는데 그 가게에서 먹은 그 맛이 아니더라는 것. 나보다 먼저 까미노를 걸은 친구와 한국에서 스페인 음식점에 가서 뿔뽀를 시켰지만 그 맛이 아니어서 엄청나게 실망만 했었고, 그 뿔뽀 요리는 지금까지도 내가 먹은 문어요리 중에 가장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뿔뽀는 식당 별로 맛의 편차가 크다. -2013년 4월
그리고 추운 날씨에 까미노를 걷는 내게 cafe con leche만큼이나 좋은 친구가 되어줬던 것은 Cola Cao라는 스페인 브랜드의 핫초코였다. 이 역시 까미노를 걸었던 또 다른 친구가 추천을 해준 것이었는데, 여름에 걷는 사람들은 콜라를 마시면서 당분을 충전한다고 하지만 눈보라 속을 헤치고 나와서 콜라를 마시는 건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당분이 부족할 때 난 항상 쉬면서 Cola Cao를 시켜마시고는 했는데, Cola Cao는 다른 핫초코들보다 덜 달아서 내 입맛에 잘 맞았던 기억이 있다.
추운 날씨엔 Cola Cao! - 2013년 3월
쌀, 그리고 한국음식
사실 까미노를 걸을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이 음식이었다. 그리고 한국 음식. 한국 사람들이 까미노를 워낙 많이 찾아서 그런지 최근 3년 전후 동안 다녀오신 분들의 포스팅을 보면 중간중간에 한국 음식은 물론이고 음료수까지 파는 가게들이 보이더라. 그런데 3-4월이 비수기라서 그런지, 5년 전에 내가 걸을 때만 해도 까미노 위에서 한국 음식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처음 3-4일 정도는 쌀을 먹지 못하니 꿈에서도 쌀이 나올 정도였으니...
하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가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도시에 도착해서 중국음식점과 식료품 점에서 볶음밥을 사 먹고, 신라면을 하나 구해서 가방에 넣은 이후로 난 단 한 번도 쌀이나 한국음식을 찾지 않았다. 한 번의 고비를 넘기고, 매일 비슷한 것을 먹다 보니 입이 또 거기에 적응을 하더라. 핫 소스가 있으면 샌드위치에 핫소스를 뿌리기는 했지만...
25일 정도 걷는 동안 난 단 한 번도 한국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만난, 이전 글에서 소개한 산티아고에 정착해서 사시는 한국 여자분을 만나보니 그분은 내가 도착하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매일 김밥을 싸들고 산티아고로 나와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김밥을 주시고는 했다더라. 한국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그리워할 걸 알기에. 하지만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게 된 그녀는 한국 사람을 만나면 뭔가를 주기는커녕 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까미노 위에서 걸을 때 한국 음식을 찾을 수가 없다며 불평하는 한국 사람들과 종종 마주쳤었다. 샌드위치에 튜브 고추장을 짜서 넣는 한국 대학생도 만났고... 후자야 이해할 수 있지만 전자와 같이 불평이 가득했던 사람들은 까미노를 왜 걸은 것일까? 그들에게 까미노는 무슨 의미였고, 무슨 의미로 남았을까?
까미노에서 유일하게 먹은 쌀. 위에 붉은 건 핫소스다 - 2013년 3월
음식보다도 사람
사실 난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을 굉장히 예민하게 분별해 내는 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서부턴가 난 음식이 상했거나 정말 너무 말도 안 되지 않으면 맛이 조금 덜한 음식도 큰 불평 없이 먹을 수 있게 됐는데, 내가 그렇게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까미노에서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엄청나다. 그걸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내가 먹었던 음식들 중에서는 그렇게 맛있었던 뿔뽀보다도 저녁에 알베르게에서 사람들과 같이 옹기종기 모여서 해 먹었던 음식들이 더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까미노에서 돌아와서야 알았다. 음식 그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먹었는지가 그 음식에 대한 기억을 지배한다는 것을 말이다. 맛이 조금 덜 한 음식도 즐겁게 여러 사람들과 먹으면, 그 음식에 대한 기억이 혼자 먹은 맛있는 음식보다 내게 더 강하게 인식되더라.
그래서 그 후로 나는 음식 자체보다도 '식사자리'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됐다. 어머니께서 일요일 아침만큼은 네 식구가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말에 내가 순순히 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이 엇갈림으로 인해서 심할 때는 일주일 내내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은 '식구'끼리 같이 밥을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 또한 언젠가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이 되지 않겠나?
음식은 매개가 될 뿐. 더 중요한 것은 음식을 매개로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가 아닐까?
까미노 위에서 함께 점심 한 끼.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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