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나누다
사실 워낙 준비를 하지 않고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까미노에서 어떤 것을 예상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쩌면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을 정도로. 사실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에 도착해서 파리행 비행기를 기다릴 때야 비로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싶은 생각이 들더라. 뭔가에 홀린 듯이, 그렇게 혼자 길을 떠난 것이 잘한 결정이었는지가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라.
그 흔들림은 파리에 도착하고 후회로 바뀌었다. 처음 도착하는 파리. 까미노를 다 걷고 나서 5일을 머무르면서 파리에 사는 친구 부부에게 설명을 들은 후에는 파리의 매력을 온몸으로 느꼈지만 사실 내게 파리의 첫 이미지는 어두움과 지저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난 빨리 생장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서 남쪽으로 향했다. '한 달을 이렇게 지내면 엄청 외롭겠구나...'란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누가 봐도 까미노를 가는 듯한 한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을까. 그 사람이 내가 이전 글에서 설명한 Bob이었다. 생장으로 가는 길에 그는 내게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아내에 대한 얘기를, 난 변호사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러면서 주위를 보니 누가 봐도 까미노로 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더라. 하지만 그중에 혼자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후회했다. 혼자 오는 것이 아니었단 생각을 하며...
알베르게에선 항상 이렇게 앉아서 대화가 오갔다- 2013년 4월
내가 만난 사람들
매년 제주도를 한 두 번씩은 갔는데 올해 갔을 때는 '이젠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진 못하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난 까미노를 걸을 때만 해도 어디를 가든지 항상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에 묵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호스텔에서 처음 만난 외국 친구들과 깊은 속 얘기하는 것을 즐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을 그렇게 지내는 게 괜찮을지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이 서지 않더라.
내가 첫 날을 Bob과 걷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아는 사람이 그였기 때문에.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하이킹을 좋아하는 아일랜드 아저씨 Allen,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자신이 직접 만든 지팡이에 가족사진을 달고 걸었던 키 큰 독일 아저씨 Stefan, 자신이 운영하던 카페를 처분하고 뭘 할지 모르는 상태로 까미노로 온 이탈리아 아저씨 Giorgio와 Bob, 그리고 나까지 총 5명이 거의 한 팀처럼 걷기 시작했다.
초반을 같이 걸었던 Bob과 Stefan - 2013년 3월.
그런데 Stefan은 키가 거의 190이 되는 장신이다 보니 보폭이 커서 엄청 빨리 걸었고, Giorgio는 군인처럼 걷는 Bob과 Allen의 페이스를 싫어했다. 자신은 이렇게 빨리 걸으러 온 게 아니고 앞에 계획되어 있는 게 없다면서 말이다. 나 역시 그들의 페이스가 버겁기도 했고, 솔직히 어쩌다 보니 다 40대 중반이 넘는 유럽 아저씨들이랑 엮인 게 조금 짜증이 났었다. 내 친구는 까미노에 가서 연인을 만들어 왔는데 난 이게 뭔가 싶어서 말이다 (참고로 그 친구는 몇 년의 연애 끝에 까미노에서 만난 연하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내가 초반에 그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내 걷는 페이스가 올라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하루에 40km를 걸어서 그들을 따돌린 이후 난 묵는 알베르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거리에서 노래하는 게 업인 내 또래 아일랜드 남자 한 명은 개와 함께 걸었고 알베르게에서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고, 아이가 셋인 미국인 목사님 가족과 나만 같은 숙소에 묵으면서 신앙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며, 묵으려던 알베르게가 닫아서 어쩔 수 없이 40km를 걸은 독일 커플과는 한국에 와서도 SNS로 연락을 하고 있고, 버스를 타고 내리자마자 마주쳤던 한국 부부네 집에서는 올해 초에 제주도에 갔을 때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다. 거기다 딸과 아시아를 여행 중이라며 한국에 왔을 때 미성년자인 딸이 드라마에서 보고 치맥을 궁금해한다고 해서 내가 치맥을 사줬던 브라질 아주머니까지.
이외에도 내가 까미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말 많고 다양했다. 어떤 이들과는 까미노를 건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SNS에서 가끔씩 서로 안부를 묻고, 어떤 이들과는 하루 숙소에서 마주치는 게 전부였지만 그 대화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경우들이 있다. 그 위에서 사람을 만난 것은 단순히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수많은 인생을, 세상을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다들 서로 처음 보고 다시 보지 않을지도 모르는 관계다 보니 사람들은 속 이야기를 조금 더 잘했고, 까미노가 끌어내는 무엇인가가 있다 보니 그 느낌에 홀린 듯 자신의 고민거리를 잠들 때까지 계속 풀어내던 기억들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남아있다.
Giorgio, Allen과 풍요로운 만찬을 벌였던 작은 알베르게-2013년 3월.
대화가 내게 미친 영향
그리고 그때는 별 생각없이 나눴던 대화들은 내 안에 생각보다 오래 남아있다. 지금까지도. Samos에서 수도원에 딸린 알베르게에 묵으면서 당시에 수도원에 계셨던 신부님과 수도원을 1시간 반 동안 거닐면서 나눴던 인생과 종교에 대한 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개신교 신자로 남게 되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모태신앙으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난 내가 다른 종교를 어떻게 봐야 할 지에 대한 문을 열어준 경험이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걸으러 와서 '언제든지 다시 먹고살 수는 있어'라고 말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직장이란 무엇이고,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것들이 사실 나비효과를 만들어서 지금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경험은 대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까미노 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며 걷는다. 물집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모르는 내 물집을 한 알베르게 주인은 치료해 줬고, 발 뒤꿈치가 까져서 신발을 벗고 있는 내게 지나가던 또 다른 사람이 내게 반창고를 줬으며, 나 역시 알베르게에서 아픈 사람들에게 내 비상약을 줬다. 사실 난 그 첫 경험을 피레네 산맥을 넘던 날 이미 했었다. 다음 마을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걷다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된 내게 Bob은 민트 초콜릿을 주고 먼저 길을 떠났고 난 그 초콜릿 하나로 당을 보충하고 걸을 수 있었다. 그러다 눈이 허벅지까지 오는 곳을 걷던 중에 어지러움증이 심하게 와서 주저앉아 쉬고 있던 내게 지나가던 전직 캐나다 외교관이었던 부부가 오렌지를 선물해줬고 난 다시 살짝 당을 보충해서 그 구간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게 오렌지를 선물해 준 전직 캐나다 외교관 부부의 뒷모습 - 2013년 3월.
까미노는 절대로 혼자 힘으로 걸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위에서 남에게 도움을 주고, 또 받는다. 그리고 사회와 달리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공격적이지 않고 자신을 다른 사람 앞에 조금 더 쉽게 연다. 그건 길 위에서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문제가 없고 사람들은 그저 걸을 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베르게에서 사람들끼리 5유로 정도씩 모아서 배 터지게 먹고 마시면서 행복했던 기억은 왜 그렇게 선명하고 아름답게 남아있는지...
인간은 본래 그렇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겨우 배낭 하나 짊어지고 걸으면서도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것을 나누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더 움켜쥐고,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이기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더 벌기 위해 몸부림치며 사는 걸까? 그렇게 사는 게 정말 사는 것일까? 이 길 위에서는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내 것을 나누는데, 난 친구라고 부르고 몇 년 동안 알아온 사람들에게도 왜 충분히 베풀지 못하며 살았던 것일까? 까미노를 걷는 내내 그런 생각들을 했다.
지난 몇 년간 가까스로 먹고 살 정도밖에 벌지 못하면서 살아오면서 이젠 그렇게 사는 것에 지쳤다고 말하자 내 친구가 '네가 물욕이 없으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버틴 거야.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이미 돈 벌기 위해서 다 포기했을 거야. 네가 돈을 벌 능력이 없는 애도 아니고'라고 말했을 때 깨달았다. 그때 나 자신에게 했던 그 질문들이 내 인생관, 세계관과 가치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난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대기업에 다닐 때 부모님께 돈을 드리는 것도 아까워하고, 몇 년 안에 얼마를 모으는 게 목표였던 사람이었다.
까미노는 이처럼 날 많이 바꿨다. 그리고 내가 바뀌기까지 까미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인생과 세상이 미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난 스스로 그렇게 내려 놓을 힘이 있는 사람은 아니기에.
장장 40km를 같이 걸은 독일 커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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