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시기
까미노를 걷고 온 사람들 중에 나처럼 몇 년이 지나도 그 시간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그 시골길 뭐 대단한 게 있다고'라면서 까미노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특별히 까미노에 대해서 별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 그런데 내가 걸었던 6년 전, 비수기인 3-4월에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만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까미노를 걸었어도 그에 대한 큰 여운이 남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그에 대한 설명은 Samos에서 내가 만났던 한 스페인 할아버지의 까미노에 대한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는데, 그 할아버지의 말은 '까미노가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까미노가 무슨 사람을 부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자신의 인생의 시기 중에 까미노에 와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인생의 모든 것이 타이밍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나? 이는 까미노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본인 인생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따라서 똑같은 시기에 까미노를 걸어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까미노를 가고 싶다는 마음은 6년 내내 항상 갖고 있었지만 내가 쉽게 떠나지 않기도 했고, 못하기도 한 것은 나의 두 번째 까미노가 첫 번째만큼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지 않은 시점이 된다면 나의 그 첫 번째 까미노의 기억이 희석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까미노는 그 자체가 엄청나게 특별한 것을 주지는 않는다. 까미노는 그 길과 개인의 심리적인 생태, 인생에서의 상황이 결합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특별한 곳으로 기억에 남는 것이지, 그 길을 걷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인들에게 '까미노 너무 좋아. 무조건 가 봐'라고 섣불리 조언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인생의 시기 중에 까미노에서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면, 그리고 그 사람의 여건이 된다면, 그때 떠나면 된다고 나는 보통 말한다. 모든 사람이 까미노를 걸어야만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떠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었다 -2013년 3월
1년 중의 시기
내가 까미노에 다시 가지 못하고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까미노를 다시 간다면 내가 다녀온 3-4월과 마찬가지로 비수기일 때 가고 싶은데 그 시간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까미노는 보통 휴가철인 6월에서 8월에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때 다녀오신 분들의 후기를 들으면 우선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차지하기 위한 경주가 어마어마하게 일어나고, 베드 버그가 많아서 그로 인해 고생하는 분들도 굉장히 많더라. 개인적으로는 그런 환경 속에서 까미노를 다시 걷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3-4월의 경우, 물론 까미노에서의 기억은 너무나 아름답게 남아있지만 예상할 수 없는 날씨, 눈보라, 진흙 속에서 걸었던 경험들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만약 다시 걷는다면 그 경험은 조금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느 정도의 녹색은 있는 까미노를 경험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5월 또는 9-11월 정도에 까미노를 가야 하는 듯하고, 그 시기에는 항상 일이 많았었다 보니 난 아직도 두 번째 까미노를 걷지 못하고 있다.
만약 시간을 조금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거나 하루에 3-4시간 정도 원격으로 일하는 프리랜서라면 까미노에 가는 시간, 그리고 까미노에 머무는 기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을 듯해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매우, 매우 부럽다. 내가 만약 그런 환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10-11월 정도에 걷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는 나와 함께 까미노를 걸었던 캐나다 부부가 본인들은 직전에 10-11월에 3주 정도 걷고 다시 돌아온 것인데 그때의 까미노가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걸은 까미노는 '같이 걸을까'에서 나온 까미노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척박하고, 삭막한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난 조금 덜 그런 시즌에 까미노를 걷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처럼 까미노는 일 년 중 어느 시기에 걷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해서 갖게 되는 인상과 추억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시기를 잘 잡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물론, 본인 인생의 시점에서 까미노에서의 경험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그와 무관하게 까미노는 그 사람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경험으로 남겠지만 말이다. 내 까미노가 그러했듯이.
내 기억 속 까미노의 1/3은 눈이지만, 다른 이들의 기억 속 까미노는 또 다를 것이다. -2103년 3월
인연이라는 것
그리고 시기에는 단순히 길 위에서의 시기뿐 아니라, 그 길을 같은 시기에 찾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주치는 시기도 그 사람의 까미노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어떤 이들은 까미노에서 만난 인연과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인들끼리 까미노를 갔다 와서 평생 다시 보지 않을 인연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모든 것이 시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까미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현실에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만 모든 것은 타이밍, 또는 시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인연이라는 것 역시 그렇지 않나? 비단 연인이나 부부의 연까지 가지 않더라도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 등의 관계도 사실은 시기와 타이밍에 따라서 그 관계가 영향을 받는다. 나 같은 경우, 채용이 진행되는 시기에 홍보실 실장님이 외국에서 살다온 내 배경이 마음에 들어서 최종적으로 선택을 하셨다고 하는데, 내가 입사하기 전에 그분이 그룹 홍보실로 가시는 바람에 나는 본래 내게 배정될 계획이었던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로 배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본래 계획되었던 업무를 맡았어도...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갔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타이밍과 시기라는 것은 우리 인생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그 의사결정을 내리는 그 시기의 환경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신을 믿고, 신이 이 땅에 갖고 있는 계획을 믿게 되는 데는 이러한 '시기'라는 우연이 겹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험이 그 시작점이 되는 듯하다.
까미노에서는 매일, 매일이 그러한 경험의 연속이다. 까미노에서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까미노를 떠난 지가 거의 6년이 되어가는 시점에도 이렇게 까미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길 위에서 그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3-4월에 항상 눈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2013년 3월
눈이 내리는 날의 까미노는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감탄과 고립되는 것의 두려움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2013년 3월
3-4월에는 눈과 비를 까미노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다.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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